김회승 경제부 정책금융팀장
동강이 흐르는 강원도 영월 산 중턱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어느 날 집전화를 신청했다. 함께 살던 아들이 도시로 떠난 뒤 안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통신 영월전화국은 산중 외딴집까지 전화선을 연결하느라 600만원을 썼다. 할머니는 아들과 가끔 통화하는 게 전부여서 한달 전화비는 2500원 남짓했다. 그나마 모자는 시외전화는 데이콤이 싸다며 082를 주로 이용했다. 지금은 민영화된 케이티(KT) 영월전화국 직원이 십수년 전 이야기라며 들려준 ‘적자 전봇대’ 이야기다.
당시엔 전화국에 유선전화를 신청하면 산 넘고 물 건너 개통을 해주던 시절이었다. 이로 인해 발생한 한국통신의 적자는 민간 통신사들이 함께 분담했다. 통신망의 공공재적 성격과 통신의 보편성 원칙에 입각해 법으로 그렇게 돼 있었다.
십수년 전 ‘적자 전신주’ 이야기를 꺼낸 건, 정권 초마다 반복되는 공공기관 개혁 논란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역시 방만 경영, 부채 경영을 개선하겠다며 공공기관 손보기에 착수했다. 정부가 강조한 ‘8대 방만경영’의 구체적인 사례는 이런 것들이다. 창립 기념일 명목으로 70만원 지급, 자녀 입학 축하금 100만원 지급, 특목고 자녀 수업료 전액 지원, 직계가족 병원비 60% 감면 등등. 이른바 ‘신의 직장’에서 벌어지는 도덕적 해이를 주로 문제 삼은 것이다.
현오석 부총리는 공공기관의 도덕적 해이를 거론하며 ‘지대 이론’을 꺼내들었다. “인천공항공사 입사 경쟁률이 800 대 1이라고 한다. 젊은이들이 이렇게 몰리는 건, 보이지 않는 지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걸 없애야 한다.” 공공기관과 그 종사자들이 독점적 지위를 통해 이윤·이자와는 구별되는 또다른 이득(지대)을 누리고 있다는 말이다.
공감은 되지만 설득력은 없다. 과연 비정상적인 특혜와 과도한 임금·복리후생을 ‘정상화’하면 그 많은 부채와 방만 경영이 해소될까? 정권을 이어 내려오는 낙하산 기관장의 무책임 경영과 수조원대 정부 사업을 떠넘겨 부채를 키워온 관행은 어찌할 건가. 부채 경영의 근원인 4대강 사업 등 수많은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이며, 방만 경영의 근원인 낙하산 기관장을 내리꽂는 청와대의 뻔뻔함은 또 어찌할 건가. 그러면서 정부는 부작용으로 우려되는 공공 서비스 축소나 요금 인상에 대해서는 어물쩍 넘어간다.
여론에 기대어 개혁을 압박하는 얄팍함은 그렇다 치고, 사업이 망해 큰 빚을 진 가장이 가족들 과소비부터 타박하는 격인데, 과연 기꺼이 고통 분담과 개혁 의지가 생길까 싶다. 과도한 특혜를 몰아내겠다며, 이들 기관에 꼭 필요한 책임감과 주인의식까지 몰아내는 꼴이어서야 되겠는가.
공공기관 정상화의 본질은 ‘공공성 회복’이다. 정부와 철도노조가 민영화를 두고 ‘위록지마’ 논쟁을 벌이는 이면에는 공공성을 둘러싼 근본적인 갈등이 놓여 있다. 평소 민영화를 통한 경쟁과 효율을 신줏단지처럼 주창하던 정부가 ‘민영화 프레임’을 유난히 부담스러워하는 이유는, 민영화로 인한 보편적인 공익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는 민심을 읽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경제 민주화는 선거 구호로 쓰고 내팽개치고 다시 대기업과 수출에 올인하는 박근혜 정부를 보면서 그런 민심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전세계에 큰 울림과 치유를 안겨준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장과 금융투기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를 경고했다. 경쟁과 효율만을 앞세운 민영화 논리가 앞서게 되면, 교황의 말처럼 “일방적이고 무자비하게 자기 식 법과 규칙을 부과하는 독재”는 남들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 영월의 할머니 집 ‘적자 전신주’엔 기꺼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다.
김회승 경제부 정책금융팀장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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