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용 정치부 선임기자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2004년 총선에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참모였다. 탄핵소추 역풍으로 한나라당은 100석 이하의 몰락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던 박근혜 대표는 악수를 너무 많이 해서 손에 붕대를 감아야 했다. ‘붕대 감은 손’에 동정 여론이 쏠리는 것을 간파한 윤여준 전 장관은 흰 붕대가 조금 더 잘 보이도록 한 바퀴 더 감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표는 “가식은 싫다”고 거절했다. 윤여준 전 장관은 “다른 것은 몰라도 정직과 진정성을 갖춘 정치인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윤여준 전 장관은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독선적 리더십에 대해 여러 차례 강한 경고를 했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선택한 것도 박근혜 대통령의 독선을 미리 내다봤기 때문일 것이다.
윤여준 전 장관은 2011년 말 <대통령의 자격>이라는 책을 썼다. 오랫동안의 국정과 정치 경험, 그리고 방대한 독서에 의한 식견을 응축한 역작이다. 그는 여기서 ‘스테이트 크래프트’(치국경륜)라는 낯선 개념을 소개했다.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필요한 능력이 아니라 선출된 이후 대통령으로서 일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는 언행의 자질, 균형 잡힌 국가관, 거시경제 지표와 잠재성장률 관리 능력, 사람을 쓰는 능력, 국가의 공공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 등 여러 가지를 제시했다.
그 기준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적용해 보았다. 국가의 최고 행위자다운 언어, 국가의 공공성에 대한 이해 등 몇 가지는 합격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항목에서 불합격이었다. 특히 사회관 분야에서 문제가 심각했다. 윤여준 전 장관은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사회관’이나 ‘인간의 사회적 공동체적 성격을 무시하는 경향’은 곤란하다고 했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 딱 그런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사회적 영역과 국가적 영역을 구분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1주년이었던 지난 19일 새누리당 당직자들과 오찬을 했다. 그 자리에서 매우 중요한 말을 했다.
“세상에 중요한 게 간절한 마음인데, 마음 가는 곳에 기가 따라가고 기가 가는 곳에 마음이 열린다는 말이 있다. 진정성과 열정으로 일하면 축복받는 길이 열릴 것이다.”
정말 그럴까? 국민들이 대통령과 집권세력에 요구하는 것이 진정성일까?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책임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선한 동기만으로 행위의 도덕성을 평가하면 안 되고, 행위가 가져온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는 심지어 “정치란 아무리 동기가 좋아도 결과가 나쁘면 안 된다. 때로 동기가 나빠도 결과가 좋다면 좋다. 이것이 정치의 본질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경찰이 철도노조 지도부를 체포한다는 명분으로 5500명의 경찰관을 동원해 민주노총 본부에 진입했다. 경찰은 이번 작전을 청와대에 미리 보고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보고를 받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원칙’, ‘법치’, ‘비정상의 정상화’ 같은 개념이 떠올랐을 것이다.
대통령의 역할이 법치에 그친다면 아무나 대통령을 할 수 있다. 경찰국가를 만들고 계엄령을 내리면 법치는 확실하게 이뤄진다. 그러나 국가 통치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대통령은 고도의 정책 수단으로 경제의 활력을 유지해야 한다. 노사정 대화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런 구체적인 성과를 이끌어낼 실력이 없다면 대통령 하면 안 된다.
경찰의 작전이 실패한 다음날 박근혜 대통령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당장 어렵다는 이유로 원칙 없이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간다면 우리 경제·사회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임금 체계 개편을 위해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철도파업과 임금체계 개편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정부와 노동계의 대충돌을 피할 길이 없다. 눈앞이 캄캄하다.
성한용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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