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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아, 현대문학 / 하성란

등록 2013-12-20 19:15

하성란 소설가
하성란 소설가
1985년 시월에 첫 월급을 받았다. 누런 월급봉투는 동전으로 묵직했다. 워낙 박봉인데다 임금 계산법에 의해 보름 이하의 근무는 날수로 계산했다. 그래도 월급을 받아 집으로 돌아갈 때는 몸이 날아갈 듯했다. 부모님 내복을 사고 동생들에게 줄 케이크도 샀다. 어머니는 첫 월급이니만큼 제대로 된 옷 한 벌 사라고 했지만 나는 그 돈으로 <현대문학> 정기 구독권을 끊었다.

사나흘 차이도 나고 한두 번 배달 사고도 있었지만 <현대문학>은 매달 배달되었다. 봉투를 열면 갇혀 있던 잉크 냄새가 훅 코에 끼쳤다. 손이 벨 듯한 날 선 종이들을 조심스레 넘길 때면 가슴이 뻐근해졌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현대문학>을 읽었다. 읽은 부분은 종이가 부풀어 책갈피가 필요 없었다. 교과서나 문예반에서 읽던 작고한 문인들의 글도 좋았지만 한창 젊고 패기에 찬 ‘현대’ 작가들의 글은 또 달랐다. 좋아하는 작가도 생겼다. 훗날 신춘문예에 응모할 신문사를 고를 때도 좋아하던 작가가 등단한 신문사를 골랐다.

그날이 그날 같은 날이 반복되었다. 누군가 발이라도 걸어 바닥에 넘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라는 문장이 떠올랐는데 아마 <현대문학>에서 읽은 글이었을 것이다. 출구가 보이지 않던 그 시절, 내 가방에는 늘 <현대문학>이 있었다. 제대로 된 옷 한 벌을 걸칠 때보다 더 큰 자신감이 생겼다. 끝까지 꿈을 놓지 않게 해주었고 자존심을 내려놓지 않도록 힘을 주었다. 그러니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은 단순한 문예지 한 권이 아니었다.

<현대문학>에 소설이 실리던 날은 아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신춘문예 등단작 다음으로 발표하는 두 번째 소설이었다. <현대문학>에서는 매년 그해 신춘문예 당선자들의 신작을 실었다. 이번 신작에 작가의 생명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쓰고 지우고 또 썼다. 마치 마지막 소설을 쓰듯 최선을 다했다.

올해 <현대문학>은 이 지면을 줄였다. 신춘문예 당선자들의 몇에게만 신작 발표의 기회가 주어졌다. 어떤 기준으로 신인들을 가려냈을까, 그렇다면 줄어든 지면은 어떤 글들로 채워진 것일까, 청탁을 받지 못한 등단자들의 심정이 이해되어 속이 상했다. 전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깨버린 편집위원들에게 항의라도 하고 싶었다. 곧이어 지면이 없어진 이들이 단지 신춘문예 당선자들만이 아니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갑자기 연재가 중단되거나 아예 취소 통보를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문단의 대선배들이었다.

며칠 전 선후배가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는 울적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현대문학>으로 이어졌고 우리는 각자만의 추억을 곱씹었다. 한참 고민한 끝에 우리는 암묵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순간 잉크 냄새가 훅 코에 끼쳤다. 질 좋은 잉크와 친환경 잉크로 대체되면서 지금은 사라진 그 냄새. 코를 톡 쏘는 잉크 냄새와 자주 손을 베던 날 선 종이, 그 감각을 일깨우며 다가오던 톡 쏘고 날 선 작가들의 문장이 떠올랐다.

젊은 작가들이 <현대문학>에 글을 싣지 않기로 결의하고 <현대문학>의 주간과 편집위원들이 사퇴했다. 그렇다고 작가들의 마음이 쉽게 돌아올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문득 혼신의 힘으로 글을 쓰던 17년 전 봄이, <현대문학>이 가방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펴지던 27년 전이 떠올랐다. <현대문학>에 글을 싣지 않겠다는 그 마음으로 <현대문학>에 다시 글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 무엇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 어느 때보다 신랄할 것도 없이 늘 그랬던 그 방법으로, 열심히. <현대문학>은 그것을 제작하는 한 개인이나 단체의 소유가 아니기에,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문예지 한 권이 아니기에.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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