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행해진 가장 잔혹한 사형 집행 방식은 능지처참이었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일반적으로 쓰인 용어로는 능지처사(凌遲處死)다. 능지는 죄인의 살점을 도려내는 고통을 가하며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가장 끔찍한 방식인데, 중국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능지처사라고 해도 실제로는 말이나 소가 끄는 수레에 죄인의 몸을 매달아 수레를 끌어서 죽이는 이른바 거열(車裂)이 최고의 극형이었다. 모반이나 대역죄를 범한 자, 존속살인 등을 저지른 패륜아와 흉악한 살인범 등에게 이 거열형을 적용했다.
죄인을 잔혹하게 처형하는 가장 큰 목적은 ‘잠재적 범죄인’에 대한 겁주기에 있다. 특히 역모죄의 경우 그 처참한 최후를 통해 ‘불충’을 경계하고 권력에 감히 도전할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크다. 그래서 처형 장면을 공개하는 것은 물론 처형된 사람들의 머리를 효수하는 방식이 동원됐다. 세조 2년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된 성삼문·이개·하위지 등 사육신을 처형할 때 관료들을 군기감 앞길에 빙 둘러서게 한 다음 형을 집행하고 사흘간 효수한 것은 대표적인 예다. 심지어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 생활을 하다 중국 상하이에서 암살된 김옥균은 주검이 조선으로 옮겨져 처참하게 능지처사당했다. 거열형은 조선과 중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있었던 것 같다. 미셸 푸코가 쓴 <감시와 처벌>을 보면 프랑스 왕 루이 15세를 살해하려다 실패한 프랑수아 다미앵이라는 인물을 처형할 때 거열 방식을 썼다고 한다. 조선시대 거열형은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러서야 폐지됐다.
북한이 장성택 전 당 행정부장을 사형시키면서 사용한 방식을 놓고 온갖 추측과 관측이 난무한다. 기관총으로 처형했다느니, 사형 집행 뒤 주검을 불태웠다느니 하는 확인하기 힘든 보도도 잇따른다. 차마 믿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이야기들이다. 정치적 숙청과 사형 집행에 이르기까지 북한이 아직도 낡은 과거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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