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용 정치부 선임기자
정치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자신이 ‘정치를 혐오하는 정치인’이라는 존재론적 모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회고록에 ‘아버지의 정치수업’이라는 장이 있다. 20대 퍼스트레이디를 할 때 얘기를 썼다.
“아버지는 훌륭한 선생님이었고 나는 착실한 학생이었다. 아버지는 역사, 안보, 경제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하셨다. 알게 모르게 나는 아버지로부터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귀한 과외수업을 받고 있었다.”
“국익 최우선이라는 아버지의 정치신념은 확고했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국민을 안정시키는 일에 당신의 전생을 걸고 계셨다.”
아버지의 수업에 야당은 없었다. 하긴 유신 시절이었다. 야당 없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철권을 휘두르던 아버지에게 받은 통치수업을 정치수업으로 포장한 것이다.
그의 인생에 다시 정치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다. 그는 “나라가 이렇게 흔들리는데 나 혼자만 편하게 산다면 훗날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을까, 죽어서 부모님을 떳떳하게 뵐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고 밝혔다. 정치 입문의 동기가 명예나 출세가 아니라 자기희생이었다는 설명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좀 섬뜩하다. 명예나 출세를 추구하는 현실 정치인 모두를 나쁜 사람들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인을 신뢰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는 정치인을 ‘선거에 나가서 당선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 몫을 챙겨야 하고 따라서 충성을 다 바치지 않는 사람’ 정도로 여긴다. ‘친박’들의 증언이 그렇다. 더구나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 사퇴 파동까지 터졌다. 앞으로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장관 될 일은 없다고 봐야 한다.
정치혐오가 양비론으로 진화하는 것은 필연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랬다. 쿠데타로 집권한 그는 국회의원을 잠시라도 지낸 적이 없다. 그는 자신에 대한 국민들의 비난을 막아주는 총알받이로 국회를 이용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의원들에게 부패와 정쟁이라는 이미지를 뒤집어씌웠다. 자신은 ‘서민을 위해 일하는 선의의 통치자’로 상징조작을 했다. 밀짚모자를 쓰고 농민들과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은 연출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는 시바스 리갈이라는 양주를 더 좋아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11월18일 시정연설에서 “정치의 중심은 국회다. 무엇이든 국회에서 여야가 충분히 논의해서 합의점을 찾아주신다면 존중하고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대치 정국의 당사자는 박근혜 대통령 자신인데도 정국 해소의 책임을 국회로 떠민 것이다. 양비론과 유체이탈은 뿌리가 같다. 정치혐오다.
정치혐오와 양비론은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다. 진영논리보다 훨씬 더 해악이 크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켜 투표율을 떨어뜨리고 선출된 권력의 권위를 손상시킨다. 물론 반사이익은 기득권층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단기적으로는 현직 대통령, 중장기적으로는 관료와 부자들이 수혜자다. 보수 성향 학자와 언론도 수혜자다. 언론에서 국회의원 세비 인상에 극구 반대하는 이유는 단순히 국민정서 때문만이 아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국회를 해산해야 할 상황”이라고 했다. 정치혐오를 부추겨 서울시장 출마의 명분을 얻겠다는 계산으로 읽힌다. 전직 총리의 정치에 대한 인식이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폭파해버려야 한다”는 시정잡배의 수준일 리는 없기 때문이다. 안철수 의원은 “낡은 틀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담아낼 수 없으며 이제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나설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양비론의 그림자가 어른거려 좀 불안해 보인다. 뛰어넘어야 한다.
데이비드 이스턴은 정치를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했다. 그건 학술적인 정의다. 현실 세계에서 정치는 요물이다. 아무리 칭찬하고 잘 해줘도 좀처럼 좋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무시하고 구박하면 반드시 보복한다.
연말이다. 국회의원 한 사람에게 10만원을 후원하면 연말정산 때 고스란히 돌려받는다. 괜찮은 정치인을 키워야 정치가 살고 정치가 살아야 경제가 산다.
성한용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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