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홍 경기대 정치대학원 교수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 요구가 터져 나왔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사제단)의 전주교구 신부들이 깃발을 들었다. 시중에는 벌써 “사람들깨나 다치겠군”이라는 말들이 오가고 있다. 우리의 암울한 과거사 가운데 ‘정의’의 사제들이 헌신해온 역사적 경험들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광주대교구의 정의평화위원회도 시국미사를 다시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새누리당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선거법 위반 재판 결과를 보지 않은 채 대통령 사퇴를 요구한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채동욱 검찰총장과 윤석열 특별수사팀장을 찍어내고 갖은 수사 방해를 하면서 재판에 맡기라는 것이다. 검찰이 원 전 원장을 기소하자 현직 검찰총장의 뒷조사를 위해 소문으로 떠도는 아이의 가족관계부를 고위 공무원이 불법 조회한 것이 드러났다. 그 배후가 어느 곳인지는 상식에 속한다. 이제 국정원 등 권력 쪽으로부터 독립이 보장된 특검이 아니고는 부정선거 의혹을 규명할 방법이 없음을 국민 다수가 인정할 것이다.
새누리당과 청와대는 박창신 원로신부의 강론 중 일부를 ‘종북 발언’으로 문제 삼았다. 그러자 전국의 극우 보수단체들이 박 신부를 검찰에 고발했고 검찰은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박 신부는 연평도 포격 사건에 대해 남북이 서로 관할권을 주장하고 있는 마당에 거기서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하니 “북한이 쏜 것 아니냐”고 했다. 민주당의 김한길 대표와 전병헌 원내대표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으면서 본질적인 문제는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이라고 지적했다. 나도 박 신부의 말에 전체적으로 동의하긴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북한을 편들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사제단 시국미사의 본질은 “부정선거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해야 한다”는 직격탄이다. 과연 그것이 사제단만의 주관적인 생각일까? 부정선거라는 심증을 굳히는 민심이 늘어가는데도 사제단의 입만 틀어막으려는 조처들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과 똑같은 과거 답습이다. 그래서 제2의 문제 핵심은 집권 쪽이 사제단의 발언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1979년 10·26 전야, 부마시민항쟁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의 심복이던 경호실장 차지철은 “불순세력의 배후 조종 때문”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러나 현장에 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시위대에 빵과 음료수를 날라다 주는 가게 주인이나 시민들을 목도한다.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반대자 300여만명을 학살했는데 우리도 한 200만 정도 쓸어버리면 문제가 없다”고 내뱉었다. 박정희는 “대통령인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호언한다. 김재규는 거기서 많은 국민이 희생당하는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감지한다. 그것이 10·26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여권의 양심 있는 인사들은 지금 차지철과 같은 ‘시국인식 불량자’가 설치고 있지나 않은지 잘 살펴보기 바란다. 집권 쪽 한두명의 권력놀음이 대통령의 판단을 그르치고 필경 비극을 불러들이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파국의 어두운 그림자를 다시 연상시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최후 상황을 닮아가는 시국에 대해 박 대통령이 내놓은 강경 발언이다. 그는 “분열을 야기하는 일들을 묵과하지 않겠다”고 언명했다. 사제단은 행동에 나선 이유를 “박 대통령이 참회할 줄 모른다”고 설명했다.
사제단의 요구에 대한 해법은 이제 국민 다수가 수긍하는 특검밖에 없다. 덧붙여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정통성이 걸린 특검을 그 자신이 결단하지 않으면 집권 쪽 내부에서 누구도 감히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이 다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막는 행동은 정당방위이고 그 명분이 역사를 움직여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하지 않았던가.
김재홍 경기대 정치대학원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