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창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이즈음 민주주의의 기초 원리를 거스르는 일이 잇달아 벌어지는 중에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국가가 나서서 편찬하려는 움직임까지 본격화되었다. 국무총리, 교육부 장관, 새누리당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위해 힘을 모으고 부실 논란의 중심인 교학사 교과서의 필자가 나서서 목청을 높이고 있다. 원로 역사학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강력한 비판을 가했는데도 국정화 주장은 가라앉지 않았다.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통일되고 올바른 국가 이념의 정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지금 시행되는 검인정제도에도 그에 대한 장치는 넘치도록 갖추어져 있다. 현재 국가는 교과서의 치밀한 설계도에 해당하는 ‘교육과정’을 정해주며, 그것만으로 모자라 ‘집필기준’까지 제시한다. 거기서 한 치라도 벗어나면 교과서로 인정받지 못한다. 많은 이가 민주주의 국가에 어울리지 않는 경직된 방식이라고 비판할 정도다. 이마저 성에 차지 않는다면 남는 것은 전체주의적 역사교육밖에 없다. 한편 어떤 이는 검인정 교과서 때문에 벌어지는 분란과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개탄한다. 하지만 독재국가나 세습군주제 시대로 돌아가지 않고 민주주의 교육을 하려면 비판과 논쟁에 따르는 정당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단일 교과서를 통해 명확히 가르쳐야 한다는 내용도 문제다. 국정 교과서가 필요한 근거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주제는 남북문제이고, 그 핵심은 대한민국의 정통성 확인과 북한체제 비판이다. 특히 1948년 대한민국만이 유엔의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이 끊임없이 강조된다. 하지만 남북한 동시 가입과 함께 유엔은 북한을 승인하였고 대한민국은 유엔 앞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포기하였다. 유엔의 권위에 집착할수록 대한민국의 유일 합법성을 내세울 수 없는 한편 분단의 고착화에 빠지게 된다. 근본적인 문제는 국정화를 주장하는 이들의 북한에 대한 대결의식이다. 그것은 남과 북이 힘을 합쳐 통일로 간다는 대한민국의 정책과도 어긋난다. 우리는 흡수통일을 하겠다는 자세를 버리고 ‘한민족공동체’의 대북 인식을 발전시켜야 한다. 국정화를 주장하는 교학사 교과서의 필자가 주장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지금 국정 교과서에 담아 학생들에게 가르치려 하는 내용은 그 반대이다.
국정 교과서의 제작 과정도 신뢰할 수 없다. 지난번 역사 교육과정을 개정할 때 교육부는 전례 없이 추진위원회를 설치하여 개정안 개발을 맡은 연구진의 독립성을 빼앗았다. 장관은 그것만으로 모자라 마지막 심의회까지 통과한 교육과정안을 일방적으로 변경하였다. 오랜 세월 우리 교육을 지켜온 ‘민주주의’ 개념을 모조리 ‘자유민주주의’로 바꾼 것이다. 그리하여 연구진 대부분이 성명에 참여하여 원상회복을 요구하고, 추진위에서도 위원 20명 중 9명이 사퇴하였다. 자기가 선정한 위원들의 격렬한 반대, 나아가 역사학계의 대대적인 비판에도 ‘권력’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후 집필기준을 작성하는 연구진부터 구성원과 논의가 비밀에 부쳐졌고, 한국사 교과서와 관련된 교육부의 비밀주의는 날로 강화되어 왔다. 현재 검인정제도도 이렇게 운영되는 마당에 국정 교과서가 어떻게 만들어질지 상상만으로도 두렵다.
집권세력이 지금 해야 할 일은 국정 교과서 여론몰이가 아니다. 우선 지금 운영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 수정심의회부터 정당한 것인지 따져보고 구성원과 활동 내역을 공개해야 한다. 한국사 교과서에 대한 논의는 역사학자와 교육 전문가에게 맡기고 그 내용을 국민이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권력자들이 나서서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단일화하자고 주장한다면 그 목적이 자신들의 집권 연장을 위한 역사관 주입이며, 그 길이 우리 사회가 힘들여 쟁취한 민주주의의 파괴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불을 보듯 명확하다.
오수창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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