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성 소설가
어째서 품어 배우던 저 음악 교과서에는 독립군 노래 한 곡 나오질 않는 것일까. 항일운동가들은 노래를 몰랐을까. 들에 가득하던 민요 가락, 저잣거리 대폿집 문턱에 퍼질러져 있던 산조, 골목을 울리던 농악마저 경황없어 잊어버린 것일까. 아이소포스가 일찍이 힐난한 베짱이 신세인 양 노래를 행여 한가로운 사치로 여긴 건 아닐까. 북간도 산과 들을 총을 쏘며 내달리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 양풍에 주눅 들어 절로 접어버렸던 것일까. 대체 왜 독립군 노래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것일까. 일제가 금하고, 해방 뒤에도 죄가 된 노래를 처음 들을 때 맺히던 눈물 한 방울이 여적지 욕스러움에야.
이토를 쏘는 총알을 재워 넣기에 앞서 안중근은 노래부터 만들어 불렀다. 장부가.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 천하를 베러 가는 길에 노래가 없다면 어찌 조선 사람이겠는가. 노래가 있어야 서슬이 날카롭고 싸움이 시가 되는 법이다. 시황제를 치고자 한 자객 형가가 연경 북쪽 이수에 이르러 목 놓아 부르던 ‘장사 한번 떠나면 돌아오길 꿈꾸랴’ 가락은 비장함이 닮았으되 또 다르다. 술과 옷과 여인을 내준 자에 대한 보응과 응칠의 노래는 가을바람에 날리는 여인네 머리칼 한 올 사이로 길을 비낀다. 중근은 망국의 흰 옷자락 끝을 밟고 미국인 존 브라우닝이 설계한 벨기에제 단총 브라우닝 엠1900 시리즈 총기번호 262336을 품고 하얼빈 역두에 나가 일곱 발 총성을 울려 삼천리를 넘어 북만주의 가을과 세계 양심과 모든 침략자의 심장까지를 격동시켰다. 단기필마로 나선 일 중 족속역사 이천년 이래 이에 비할 용맹하고 거룩한 행동은 단호히 없었다. 고작 여섯 자리에 지나지 않는 그 총기번호는 연인 전화번호보다 외기 쉽나니. 무게 625그램, 길이 172밀리미터. 이 숫자는 마땅히 이 족속 뼈마디의 일부인저. 노래는 마땅히 거기서 스미어 나와야 하나니.
국민학교(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받아온 그 미술책에는 왜 독립군 그림 한 장 박혀 있지 않은 것일까. 혹시 물감조차 없던 형편이었을까. 항일투사들 앞에서 붓 장수는 문을 닫고 필묵가게들은 먹을 감춘 것일까. 해방 뒤 두루 인쇄술이 부족해서, 자칫 문교행정 실무자가 술을 마신 이튿날 빠뜨리기라도 한 것일까. 교실마다 벽마다 빈틈 보이랴 불그죽죽 나붙던 포스터서껀보다 미적 수준이 미치지 못하기라도 했던 까닭일까.
이항복 이래 열 정승을 낸 삼한 갑족 이회영은 전재산을 서둘러 팔아 광무황제 잠 못 들던 경술년 그 겨울밤 마차 열 대에 솔가하여 언 국경을 넘어갔다. 만주에서 땅을 골라 총 쏘고 칼 쓰고 노래 짓는 학교를 만들었으니 열다섯 살 김산이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하던 군사학교,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자 만든 신흥무관학교라. 베이징으로 나와 활동할 때 구멍 난 신발을 꿰고 다니던 이회영은 언 묵을 녹여 난초를 쳐 그 값을 독립자금으로 내놓았다. 난을 팔아 칼을 얻었으니, 사군자 묵향이 이토록 기상 어린 미학으로 빛난 적이 일찍이 없었음이여. 굶어 죽은 둘째 형 석영의 그림자가 그 난 잎 사이에 비치지 않는다면 후세란 대체 무엇일 수 있을 것인가.
해방마저 약탈해간 친일파 주도 교육에서 항일문화는 거세되었다. 저 장부가와 그 묵란을 이 책갈피에 심었을 때라야 비로소 온전한 교과서일 수 있다. 하물며 식민지 근대화론과 이승만 옹호는 헌법정신을 명백히 거스르고 있다. 우리 헌법 전문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있다. 어떤 발전론도 친일로는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실업자 한 명 없게 한 나치 제3제국 시대를 발전이라고 입초시에 올리는 자는 서구사회에서 상식인의 범주를 벗어난다. 당치 않은 건국론 따위는 시민, 학생 손에 내쫓긴 독재자 대통령 이승만을 결코 대신하지 못한다. 이것이 교과서가 나아가야 하는, 역사의 가슴 데우는 방향일 따름인지라.
서해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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