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문 호루라기재단 상임이사
“공군 ○○○사령부에서 여당 지지 정신교육이 있었다”는 <한겨레> 보도가 있었다. 며칠 뒤에는 야당 후보에게 혼외자가 있다는 유인물을 돌리던 정보기관 직원이 잡혔다는 기사가 신문을 장식했다. 그다음에는 군부대에서 여당 지지 공개투표가 있었다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몇달 뒤 관권선거의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던 군수의 양심선언이 그해 여름을 더 뜨겁게 하였다. 이러한 군·정보기관·행정기관의 낯 뜨거운 선거개입이 있었던 것은 21년 전인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과정이었다.
그런데 21년 전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이 빛바랜 기사 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막 찍어낸 활자인 듯 지금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마치 데자뷔처럼 군·정보기관·행정기관을 동원한 선거개입이 정확하게 20년 만인 지난해 대선 때 반복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는 기사들을 연일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과 군 사이버사령부 요원들의 선거개입 댓글뿐만 아니라 국가보훈처, 심지어 기상청에서조차 안보교육을 빙자한 야당 폄하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면서 당시 중위 신분으로 군부대 안 부정행위를 고발했던 필자로서는 선거 공정성의 수준이 20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11월 날씨가 벌써 춥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조금은 다행스러운 것은 국정원 직원과 군 사이버사령부 현직 군인의 제보가 있었기에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고 수사 과정에서 권은희 과장, 윤석열 팀장과 같은 이들이 소신을 갖고 행동하였기에 묻힐 수 있었던 진실들이 하나둘씩 밝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정원 제보자의 경우 국정원에서는 추악한 범죄자, 인간쓰레기로 매도하면서 파면시키고 비밀 누설이니 정치 관여 위반이니 하는 실정법을 들이대어 처벌하고자 했고, 권 과장 경우 고향을 들먹이면서 특정 지역의 경찰이니 폄하하는 발언이 여당 국회의원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나오기도 하였다. 윤 팀장 역시 검찰에서 항명으로 몰아붙이며 국정감사장에 나왔던 검사장들 모두 새누리당 의원들과 같은 목소리로 윤 팀장의 행위를 비난하는 데 앞장섰다.
이처럼 특정인이나 해당 조직이 아니라 우리 국민과 사회 앞에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국가기관의 잘못된 행태를 고발하고, 수사 과정에서 외압에 의해 진실 규명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사람들이 오히려 탄압을 받고 있는 것이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책임 있는 정부라면 이들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이들이 제기한 명백한 국기문란이자 헌법과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중대 범죄행위와 그러한 범죄를 은폐하고자 했던 외압에 대해 지금이라도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그 결과에 따라 관련자 처벌과 사과, 재발 방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자 한다. ‘정의롭지 못한 것을 봤을 때 여기 정의롭지 못한 것이 있다고 호루라기를 부는 것에서 정의는 시작한다’고. 그리고 누군가 그렇게 부르짖은 정의를 우리가 지켜줄 때 그 정의가 뿌리내릴 수 있다고. 내부 공익 제보를 20년 먼저 했던 사람으로서 국가기관의 선거개입과 외압으로 제대로 된 수사를 하지 못하는데 어쩔 수 없이 참여했던 이들이 있다면 이제 그러한 불의를 바로 세워보자고 권한다. 비록 정의의 길은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는 험난하더라도 말이다.
이지문 호루라기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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