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대통령이 위기 국면에서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는 중요한 문제다. 그것은 대통령이 공동체 구성원들과 책임 있게 소통하는가를 평가하는 일차적인 근거가 된다. 아울러 권력과 지도력의 성격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의사소통 연구자들이 대통령의 위기 대응 언어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구경서 박사 등).
박정희가 집권 18년 동안 한 1541개의 정치연설 분석 결과를 보면, 그는 나라가 위험에 빠져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국민들을 결속시키는 ‘위기 프레임’을 즐겨 사용했다. 5·16 쿠데타 뒤 한동안 그는 “국가가 정치, 사회적 혼란”에 빠져 있다고 주장했다. 제3공화국에서는 “북한의 위협”을 강조했는데, 그 시절 북한의 위협이 전혀 없다 할 수는 없지만 국가적 위기라고 볼 정도는 아니었다. 유신시대에 그는 “정치, 사회적 혼란”으로 다시 강조점을 옮겼다. 말을 조금씩 바꿨지만, 필자가 볼 때 군사 쿠데타와 권력 연장의 명분으로 삼자는 의도는 똑같았다. 대통령 의제 외의 다른 담론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언어의 독점이 횡행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위기 상황에서 권력 행사 가능성을 강조했다. 그의 연설문은 종종 “정부는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 “정부는 단호하게 대응할 것” 등의 위압적 어휘를 담았다. 위에서 찍어 누르는 언어 사용으로, 결코 민주적이지 않지만 진의를 숨기는 화법도 아니었다.
노무현은 “대통령의 말이 인위적으로 조절되는 시대는 끝났으며 대통령의 말은 노출될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국정 현안에 대한 견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길 즐겼다. 다른 대통령들에 비해 노무현은 “나” “저”라는 1인칭 주어를 많이 사용하고, “우리” “사회” “국가” “국민 모두” 등의 복수형 주어는 덜 썼다. 1인칭 주어는 자기 뜻을 솔직하게 드러내기 좀 더 쉽다. 재임중 “막말 대통령”이라고 공격받아 정치적으로 손해를 봤겠지만, 아무튼 ‘언어의 민주화’가 진전된 시대임은 분명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표적인 언어 습관은 부작위의 언어, 즉 침묵이다. 정당 지도자 시절의 그는 현안에 대해 질문을 받고도 대개 말을 아꼈는데, 이로써 기품 있는 지도자 인상을 보태기도 했다. 그러나 국정 책임자인 대통령으로서는 달라야 한다. 분명히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영역에 대해 대통령이 의견을 표명하지 않는다면, 책임 있는 공적 논의가 어려워진다.
더욱이 지금 국가정보원과 경찰, 군, 국가보훈처에 이르기까지 온갖 국가기구의 대선 개입 혐의가 드러나고 있다. 대선 여론조작은 간단한 선거범죄가 아니다. 과거에 막걸리 선거, 고무신 선거, 돈봉투 돌리기 선거가 유권자를 개별적으로 매수하는 것이었다면, 사이버 공간에서의 여론 조작은 대중의 눈과 귀를 송두리째 가리는 행위다. 더욱 치밀하게 선거범죄가 진화한 것이며,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파괴하는 짓이다.
범죄 진상 규명을 가로막기 위한 권력의 작용이 잇따르는 것은 더욱 큰 문제다. 채동욱 검찰총장을 찍어내고, 윤석열 여주지청장까지 수사팀에서 찍어냈으니 말이다. 오죽하면 새누리당의 이재오, 정몽준 의원마저 정부의 조처에 우려를 표시하겠는가. 국가 권력기관의 정치적 중립성이 의심받고 대선 결과의 정당성도 흔들리고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계속 침묵한다면 범죄 은폐를 방조한다고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박정희나 전두환의 화법보다도 더욱 나쁜 국정언어로 볼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은 지난번 오바마 미국 대통령한테 연설에 대한 조언을 요청하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답을 들었다. 박 대통령이 지금 새겨야 할 말이 바로 그것 아닐까.
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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