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겸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를 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란다. 효녀다. 심청이 못지않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 깊은 곳까지 헤아리는지는 의문이다. 아니, 이대로라면 박정희 이름 석 자 뒤에 따라붙는 꼬리표, 친일파나 독재자는 영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지난주 아펙 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아베 일본 총리를 싸늘하게 외면했다. 그 냉랭함에 아베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여러 신문의 1면을 장식한 장면이다. 일본이 과거 역사를 사과하지 않는 한 눈길조차 주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국내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딴판이다. 박 대통령이 ‘올바른 역사’를 얘기하고 이승만 찬양론자를 국사편찬위원장에 앉히자, 뉴라이트 쪽은 신이 났다. 교과서에 식민지 근대화론을 버젓이 싣고, 친일파를 애국지사로 둔갑시키며, 이들을 감싼 이승만은 영웅이 됐다. 박정희는 이들과 한데 엮여 우파의 정통성을 받쳐주는 한 기둥이 된다.
과연 박정희는 이런 대접을 받고 싶을까? 친일파 논란이 있지만, 사실 다카키 마사오는 삼류에 불과했다.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유달리 출세욕이 강한 식민지 청년 정도로 봐주는 게 객관적일 것이다. 요즘은 진보 쪽 사학자들도 만주군 보병 8단에서 1년여 근무는 했지만, 단장 부관으로 일했기 때문에 팔로군과의 총격전에는 거의 참가하지 않았던 쪽으로 정리를 하는 추세다.
게다가 박정희는 이승만과 상극이었다. 52년, 60년, 61년 이렇게 세 번 쿠데타를 기도했는데, 앞 두 번은 이승만 정부를 엎어버리기 위해서였다. 하와이에 있던 이승만이 귀국하고 싶어했지만 그걸 끝내 거부한 것도 박정희다. 그가 쓴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을 보면 “이승만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와 부패한 자유당 관권 중심의 해방 귀족” 등의 표현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설령 박정희가 이들과 연관이 있더라도 숨기고 잘라버려야 할 판에 한 묶음으로 만들고 있으니,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친일파보다는 독재자 딱지가 더 강렬하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승만은 경찰을, 박정희와 군인 대통령들은 중정과 안기부를 동원했다. 김영삼 이후는 검찰이 권력의 칼날이 됐다. 그만큼 세상이 개명하여 최소한의 법적 절차는 지켜야 하는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국정원을 감싸고돌면서 검찰의 수장은 목을 쳐버렸다. 국정원이 통치기구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만큼 국민들은 음습했던 70년대 남산을 떠올리게 된다.
더구나 혼외자식 문제를 건드렸다. 허리 아랫도리로 치자면 박정희만큼 숱한 일화를 남긴 사람이 없다. 영화배우 문일봉은 1991년 여러 여성지에 “박정희 대통령과의 사이에 딸 셋을 낳았다”는 내용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하는 족족 아버지의 구린 구석을 들춰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박정희도 젊었을 때는 대통령 면담을 요구한 야당 초선의원 김상현을 1시간40분 동안 만나주는 등 민주주의 기본은 하려고 나름 애를 쓴 면모가 엿보인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청년 박정희’가 아니라 유신 이후 오로지 권좌에만 집착한 ‘노인 박정희’만 닮아가고 있다.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 있다. 70년대 3년간 청와대를 출입했던 <서울신문> 기자는 한 인터뷰에서 “육영수 여사가 죽은 뒤로 박정희 대통령은 근혜씨 등 자식들에게 약점을 잡혔는데, 그중의 하나가 문란한 여자관계”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무리 퍼스트레이디였다고 해도, 딸과의 관계가 민망해진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얘기는 한계가 있다. 젊은 날 가졌던, 자신의 꿈과 열정을 전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부녀지간의 소통 부재가 지금의 ‘불효’를 낳고 있겠거니 짐작해본다.
김의겸 논설위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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