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 경제부장
<한겨레>가 8월22일치 1면 ‘동양그룹 채권 투자자 4만명, 폭탄을 안고 산다’는 기사를 시작으로 ‘동양 사태’를 주도적으로 보도할 즈음 대략 난감한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동양과 한겨레 사이에 무슨 일 있는 거냐’는 식의 물음이었다. 이른바 보복성 기사 아니냐는 것이렷다. 후~우, 달은 외면하고 손가락만 쳐다본다는 건 이런 때 쓰라고 만들어놓은 말일 게다.
동양 쪽 사람들을 만난 자리에서도 사태를 음모론적으로 보려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보도 내용의 진위에 대한 주장을 펴기에 앞서 보도를 하게 된 배경을 묻거나, 보도의 실마리를 누가 제공했는지 대략 짐작하고 있다는 식의 발언 때문이었다. 경영 환경상 적대적인 경쟁관계에 놓여 있는 쪽에서 동양에 나쁜 정보를 흘리고 언론에서 받아 쓰고 있는 것으로 믿(고 싶어하)는 태도는 난감함을 더했다.
얼마 전 취재기법 공유 차원에서 부서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동양 사태 보도를 주도한 현장 기자로부터 취재 경위와 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전해 들었다. 동양이 심상치 않은 자금난을 겪고 있으며, 관련 투자자들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풍문을 실마리로 삼은 것 외에 기사에 포함된 수치를 비롯한 갖가지 기사 재료는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따위에 이미 다 공시된 내용이었다. 현장 기자는 외부에 단편적으로 공개돼 있는 쪼가리 정보들을 맥락에 맞게 이리저리 퍼즐처럼 끼워맞추는 과정에서 눈이 빠지는 줄 알았다고 했다.
한 경제신문에서 일할 당시 겪었던 일에서도 음모론의 허망함을 절감한 바 있다. 극심한 자금난에 빠진 대우그룹 처리가 최대 현안으로 부각된 외환위기 직후였다. 대기업 구조조정 작업을 실무적으로 총괄하던 금융감독위원회 소속의 어느 국장 방에서 ‘절도’하듯 우연히 취한 자료를 바탕으로 대우조선, 대우자동차 처리 방향을 보도했다. 기사가 나간 뒤 출입기자들 사이에선 ‘금감위가 마이너 언론에 일단 흘린 뒤 여론을 떠보려 한다’는 말이 물결처럼 퍼져나가며 정설로 굳어지는 분위기였다.
세상에 떠도는 모든 음모론을 거짓으로 몰 수는 없을 것이다. 음모론은 맞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음모론 제기는 사태의 원인을 모두 외부로 돌림으로써 내적 원인을 외면하는 결과로 이어져 문제 해결의 적기를 놓치기 십상이다. 기자에겐 낙종의 핑계로, 관련 기업에는 경영난의 책임에서 벗어나는 빌미로 이용하기에 음모론은 매우 편리한 도구다.
축구로 치면 신문을 비롯한 언론매체는 선수나 심판이 아니며 관중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게임 참가자가 아닌 국외자의 냉정한 처지에 머물러야 한다는 당위론인 동시에, 게임에 참가할 역량을 갖고 있지 않다는 현실론이기도 하다. 언론의 보도가 죽을 기업을 살릴 수도 없고, 흥할 기업을 망하게 할 수도 없으며 다만 수면 밑의 문제를 위로 끌어올려 문제 해결의 장으로 나아가는 실마리를 마련하는 정도일 터이다.
동양 관련 뉴스가 폭발하듯 어지럽게 불거질 당시 여러 채널을 통해 들어온 정보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끈 것 하나는 현재현 그룹 회장의 성품에 관한 내용이었다. 현 회장과 이해관계가 엇갈릴 법한 이들한테서 나온 얘기까지 포함해 일치된 한 지점은 그가 더없이 반듯한 품성의 소유자라는 평판이었다. 한마디로 ‘재계의 신사’라는 전언이었다. 현 회장 개인적으로는 매우 뼈아팠을 내용의 보도에 대해 섭섭함보다는 ‘그 문제를 밖에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라는 식의 자책성 태도를 보였다는 대목에서는 어떤 격 같은 걸 느낄 수 있었다. 동양 사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현 회장이 세간에 알려진 품성이 진실 그대로였음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김영배 경제부장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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