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무 스포츠부 선임기자
몇년 전 ‘피스컵 국제축구대회’ 취재를 위해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에 갔던 한국 취재진은 참으로 황당한 꼴을 당했다. 레알 마드리드 안방구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예선 경기가 열렸는데 문전박대를 당한 것이다. 레알 구단 쪽 사람들은 한국에서 온 피스컵조직위원회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었고, 알 수 없는 이유로 한국 취재진의 경기장 입장을 막았다. 프레스석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른 문으로 가라고 해 그쪽으로 가면 저쪽 문으로 가라고 했고 그런 일이 반복됐다. 결국 스탠드 2층 꼭대기에서 관전해야 했다. 피스컵조직위가 수백억원을 들여 레알 등 유럽 명문클럽들을 초청해 주최한 대회였으나 주객이 완전히 전도된 느낌이었다. 거기에 간 한국 기자들은 “피스컵을 왜 여기서 여는 거지? 돈이 썩었다”며 한숨을 토해냈다.
올해로 벌써 4회째 대회를 치른 ‘포뮬러원(F1) 코리아 그랑프리’. 6일 전남 영암군의 코리아 인터내셔널 서킷에 다시 갔다. 수도권 거주자들은 집을 나서 경기장 스탠드까지 도착하려면 5~6시간 걸리는 수고를 감내해야 했다. 아무튼 거기서 다시 한번 과연 누굴 위한 포뮬러원인지 의문이 들었다. 무엇보다 포뮬러원 운영사인 ‘폼’(FOM)의 무소불위의 위세를 실감할 수 있었다. 매년 폼에 수백억원대의 개최권료를 지급하는 전남도의 대회조직위원회는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전남도 깃발을 경주장에 설치하는 것조차 폼으로부터 거부당했다. 국내 팬들을 위해 전광판에 한글 자막도 넣으려 했으나 역시 할 수 없었다.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폼은 개최 지역에 대한 배려는 안중에도 없었다. 심지어 사전행사로 마련된 공군 블랙이글의 에어쇼도 입장객을 위해 경주장 상공에서 하려 했으나 안전상 이유로 보험료 8000만원을 요구해 결국 옆쪽에서 해야 했다고 조직위 관계자는 푸념했다. “포뮬러원이 열리는 지금, 이곳 영암은 한국 땅이 아닙니다. 폼은 철저히 자기 권리만 챙기려 해요.”
2010~2016년까지 7년 동안 코리아 그랑프리를 개최하기로 폼과 계약을 맺은 전남도. ‘슈퍼갑’인 폼에 ‘을’ 신세다. 게다가 대회 개최로 인한 전남도의 적자는 첫해인 2010년 725억원, 2011년 610억원, 2012년 386억원 등 총 1721억원인 것으로 드러났다. 수익은 얼마 안 나는 상황에서 개최권료가 큰 부담이다. 전남도는 결국 폼에 협상단을 파견해 첫해 700억원대, 지난해 500억원대에 이르던 개최권료를 올해는 대폭 줄였다. 그러자 폼은 매년 10월에 열리는 코리아 그랑프리를 내년 4월(25~27일)로 일방적으로 옮겨버렸다. 버니 에클스턴 회장은 이번 대회에 오지도 않았다.
이런 이유로 내년 개최 무산설이 번져 나가자, 대회조직위원장인 박준영 전남도지사는 7일 기자회견을 열어 폼의 결정을 받아들이겠다고 사실상 항복 선언을 했다. 불과 6개월 만에 5회 대회를 열어야 할 판이 됐다.
박 지사는 내년에 임기가 끝난다. 임기 뒤 그는 떠나면 그만이고, 후임자는 코리아 그랑프리 개최로 인해 누적된 문제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자동차경주 마니아들에게는 좋은 기회지만, 전남도와 도민들에게 애물단지가 돼 버린 코리아 그랑프리. 지방자치단체들의 무분별한 국제대회 유치로 인한 대표적인 실패 사례라 할 수 있다.
포뮬러원은 올림픽·월드컵과 함께 세계 3대 스포츠대회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중앙정부조차도 전남에서 열리는 코리아 그랑프리에는 무관심하다. 지난해까진 국무총리가 경기장을 찾았으나 올핸 고위 관리를 찾아볼 수 없었다. 기업들도 후원에 인색하다. 진퇴양난에 빠진 코리아 그랑프리.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대회 개최권을 따온 정영조 전 한국자동차경주협회(KARA) 회장은 지금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김경무 스포츠부 선임기자 kkm10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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