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승 경제부 정책금융팀장
동양그룹이 결국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젠 그 뒤치다꺼리가 숙제로 남았다. 당장에 부실회사의 어음과 채권을 들고 있는 개인투자자 4만여명이 문제다. 속아서 샀든 위험한 걸 알고 샀든 상당한 손실은 불가피하다. 동양채는 오래전부터 투기등급으로 분류된 터라 더욱 투자자 책임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요즘 여윳돈 좀 불리려다 물렸다는 주부들의 하소연 전화를 많이 받는다. 딱한 노릇이지만 어쩔 수 없다.
동양 사태는 8월 중순께 <한겨레>가 ‘불편한 진실’을 보도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완전 자본잠식 상태의 부실회사가 어떻게 수조원대의 어음과 채권을 계속 발행할 수 있을까? 사정을 들여다보니, 말이 좋아 시장성 여신이지, 대출 길이 막히자 고금리를 얹은 사채로 빚내서 빚갚기를 하는 구조였다. 자금난에 처한 기업이 돈 끌어오는 걸 탓할 이유는 없지만, 부실 폭탄을 불특정 다수의 개인에게 확대 재생산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동양 사태는 재벌의 속성과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첫째가 오너 리스크다. 위기의 씨앗은 현재현 회장 등 오너 경영진의 오판과 배짱에서 비롯됐다. 구조조정으로 부실을 털어내야 할 시기에 사업 확장에 눈을 돌렸다. 한 푼이 아쉬운 판에 ‘헐값에는 못 판다’며 자산 매각을 머뭇거렸다. 위기설이 파다한 기업이 내놓은 물건을 누가 제값 주고 사겠는가. 지분을 팔면서도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 훗날 지분을 되살 수 있는 조건(콜옵션)을 달았다. 그 대신 매각 가격은 낮아졌다. “자산 매각을 서두르지 않으면 (회장님이) 노숙자가 될 수도 있다는 보고서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게 전 임원의 증언이다.
둘째는 순환출자로 얽힌 재벌 구조의 폐해다. 동양은 부실 계열사의 자산을 비싸게 사주거나 담보를 제공하면서 멀쩡한 계열사까지 부실의 덫에 빠지기 시작했다. 부실은 그룹 전체로 빠르게 확산됐다. 한때 100%대 수준이던 그룹의 부채비율은 불과 몇년 새 1200%까지 커졌다. 과연 우량 계열사들이 독자적 판단으로 훤히 보이는 부실 덤터기를 썼을까? 오너와 경영진, 이사회의 배임 혐의를 반드시 물어야 할 대목이다.
셋째는 금융계열사의 사금고화가 여실히 증명됐다는 점이다. 동양채는 거의 대부분이 동양증권을 통해 팔렸다. 기관은 쳐다보지도 않는 투기등급채를 동양증권의 탄탄한 소매망을 통해 개인들에게 판 것이다. 그런데 10월 이후에는 더 이상 동양증권을 통해 계열사 투기등급채를 팔지 못하게 됐고 유동성 위기가 불거진 것이다. 결국 동양증권이 없었다면 ‘사채 폭탄 키우기’는 애초에 불가능했다는 얘기다. 지금 국회에는 보험·증권 등 제2금융권까지 대주주 자격을 강화하고 의결권 행사를 제한하는 법 개정안이 올라가 있다. 이번에 외양간이라도 단단히 고쳐야 한다.
동양 사태의 공범은 금융당국이다. 당국은 일찌감치 동양채 폭탄의 위험성을 알고도 수년째 이를 묵인하고 방치했다. 부실 리스크가 시장에 마구 뿌려지고 있는데도 금융권 여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팔짱을 꼈다. 올해 4월에야 감독 규정을 바꿨지만, 늦어도 한참 늦었다. 더구나 자구책을 마련하겠다는 동양의 말만 믿고 6개월 말미를 주는 인심까지 썼으니, 안이한 판단에서 동양의 오너 경영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장에선 제2, 제3의 동양에 대한 흉흉한 분석들이 나오고 있다. 웅진·에스티엑스·동양의 잇단 몰락은 금융위기 이후 미진했던 구조조정을 반증한다. 현재 기업들이 시장에 돌린 어음은 60조원에 이른다. 부실은 경기가 나쁠 때 드러나기 마련이다. 반창고로 대충 붙여두면 얼마 못 가 고름이 터져 나온다.
김회승/경제부 정책금융팀장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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