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대통령과 개에 대한 단상

등록 2013-08-28 18:58

김종구 논설위원
김종구 논설위원
개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의견(義犬)이다. 개도 모름지기 일생에 단 한 명의 주인을 섬겨야 진정한 충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의견은 한발 나아가 주인의 목숨까지 구하는 장한 개다. 주인이 술에 취해 풀밭에서 잠든 사이 들불이 번지자 냇물로 몸을 적셔 불을 꺼 주인을 살리고 자신은 죽었다는 전북 임실군의 오수개 설화는 대표적인 예다. 학자들이 분류한 의견 설화의 유형은 진화구주형(불을 꺼 주인을 구함), 투호구주형(호랑이 등의 맹수를 물리침), 폐관보주형(주인의 억울한 죽음을 관청에 알림) 등 무려 14가지에 이른다. 이처럼 의롭고 충직한 개를 위해서는 비석을 세워주기도 하는데 이를 의견비(義犬碑) 또는 의오비(義獒碑)라고 한다.

뜬금없이 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얼마 전 가까운 친구한테 들은 촌철살인의 논평 하나를 독자들과 함께 나누기 위함이다. “의견을 위해 비를 세워주는 경우는 있어도 맹견을 위해 비를 세워주는 일은 없다.” 과거 친일경력이 있는 백선엽 장군에 대한 미화 작업이 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을 단칼로 내리치며 한 말이다. 정곡을 찌르는 비유가 아닐 수 없다.

백씨는 잘 알려져 있듯이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무장조직을 토벌하는 간도특설대에서 활약했고, 광복 후에는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일부 보수주의자들한테서 ‘6·25전쟁의 영웅’이라는 칭호도 얻었다. 그렇지만 그는 주인을 바꿔가며 섬겼으니 의견은 어림없고 충견 축에도 못 낀다.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아무 주인이나 따르며 싸움을 잘한 맹견 정도가 고작이다. 그런데도 국방부가 그의 이름을 딴 ‘백선엽 한미동맹상’을 제정하고 그가 입었던 군복을 문화재로 등록하려는 등 과도하게 떠받드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웃을 노릇이다. 그가 과거 군내 좌익세력 척결 과정에서 박정희 소령의 목숨을 구해준 데 대한 보은 차원인지는 모르겠지만 맹견을 위한 공덕비는 난센스 중의 난센스다.

백씨만이 아니라 권력 주변에는 맹견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끊이지 않는다. 새 주인을 위해 옛 주인을 물어뜯는 것도 예사다. 그러나 제대로 맹견이 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저 맹구(猛狗)로 그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똑같이 개를 뜻하는 한자지만 견(犬)과 구(狗)는 격이 다르다. 사냥개인 엽견(獵犬)도 사냥이 끝난 뒤 가마솥에 들어가 삶아지는 신세가 되면 ‘구’로 전락한다.

최근 사임한 양건 전 감사원장을 보면서도 맹구란 말이 떠오른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4대강 사업 축소·은폐 감사로 일관하다가 박근혜 정부 들어서 4대강 사업을 할퀴는 선봉에 서더니 결국 토사구팽 신세가 됐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도 맹구이기는 마찬가지다. 재임 기간 내내 반대편 물어뜯기에 몰두하고 대선 때는 박근혜 후보 당선을 위해 맹렬히 뛰었으나 그것은 결국 어리석은 용맹일 뿐이었다.

어리석은 용맹을 발휘하는 맹구들은 지금 박근혜 정부 안에도 널려 있다. 주인이 원하는 목표물을 향해 이빨과 발톱을 세우고 돌진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망치고 주인을 위태롭게 한다. 박 대통령을 위해 견마지로를 다하려는 분들께 간곡히 권한다. 맹견이 되려고 하지 말고 의견이 되시라. 지금 박 대통령은 지지율에 취하고 조그만 성취에 혼미해져 민심의 들불이 서서히 번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의견이 되기 위해서는 굳이 냇물로 몸을 적셔 불 위에 뒹굴 필요도 없다. 차가운 냇물을 주인의 이마에 떨어뜨려 미몽에서 깨어나게만 해도 된다. 그것은 소통과 화합의 냇물, 겸허와 성찰의 냇물이다.

그러나 이런 권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전임 국정원장의 처참한 말로를 눈앞에 보면서도 후임자는 또다시 사나운 발톱을 세우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무단공개로 평지풍파를 일으키더니 이번에는 내란음모죄란 어마어마한 죄목을 앞세워 통합진보당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에 들어갔다. 수사 진행 경과를 지켜봐야겠으나 조그만 허물을 부풀리고 비틀어 정치적으로 활용한 과거 공안통치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만 같다. 천지에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오호라, 어리석은 맹구들이 주인을 망치고 나라를 어지럽히는구나.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광기에 빠진 역사 속 폭군이 이러했으리라 [박현 칼럼] 1.

광기에 빠진 역사 속 폭군이 이러했으리라 [박현 칼럼]

[사설] 시민의 승리, 민주주의는 살아있다 2.

[사설] 시민의 승리, 민주주의는 살아있다

오늘 윤석열 탄핵안 가결된다 [12월14일 뉴스뷰리핑] 3.

오늘 윤석열 탄핵안 가결된다 [12월14일 뉴스뷰리핑]

명예를 안다면 대통령직 사퇴하라 [성한용 칼럼] 4.

명예를 안다면 대통령직 사퇴하라 [성한용 칼럼]

[사설] ‘극우 내란 선동’ 나선 윤석열, 당장 끌어내려야 5.

[사설] ‘극우 내란 선동’ 나선 윤석열, 당장 끌어내려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