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는 참으로 다사다난했습니다.
봉급생활자들의 속을 뒤집어 놓은 ‘세제 개편안’에서 시작해, 남북간의 개성공단 실무 합의와 국민을 대표하는 기구인 국회를 우롱하는 원세훈, 김용판씨의 청문회 증언을 거쳐,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시민들의 변함없는 촛불 시위로 한 주가 마무리됐습니다. 남북 합의로 기록적인 무더위를 잠시 잊게 해주는가 싶더니 결국 더 큰 불덩이만 안고 또 한 주를 맞게 된 것입니다.
개성공단 합의는 특기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남북 화해의 상징이었던 개성공단의 소생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이보다 더 주목할 것은 북쪽의 새 지도자 등장 이후 잇따랐던 3차 핵실험,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 그리고 개성공단 잠정 폐쇄 등 모험주의적 행보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앞으로 북쪽은 정치·군사적 이유로 공단의 운영을 위협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남쪽은 합의 내용대로 개성공단을 더욱더 발전시키고 확장시켜 북한이 국제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으로 커갈 수 있도록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동화와도 같은 님의 디엠제트(DMZ) 세계평화공원 구상도 그 공허성을 조금은 벗을 수 있을 겁니다.
국정의 주도권을 다투는 야당이야 걱정이 컸을 겁니다. 사실 이번 합의는 금강산 관광 재개와 이산가족 상봉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렛대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님에게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확고히 하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선순환의 남북관계가 국내 정치용 ‘꼼수’가 아니라 항구적 평화를 위한 초석이 되는 것이라면 누구도 거기에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모쪼록 이번 합의를 계기로 이명박 정부가 퇴행시킨 것들을 모두 복원하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을 넘어서, 한반도 평화의 항구적인 기반을 마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기억할 게 있습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좋건 나쁘건 남북관계에서 일어나는 대형 사건이나 이벤트는 국내 정치를 휩쓸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효과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정상회담 등 남북관계의 특수도 국내 정치 현안 하나 덮지 못했습니다. 국정원의 선거 공작 문제도 과거 같으면 개성공단 특수에 묻혀 갈 법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원세훈, 김용판씨의 대국민 모독형 증언 태도나 두 사람의 변호인이 되어버린 새누리당 의원들의 태도 탓도 있겠지만, 광장의 촛불은 변함없이 타올랐습니다. 그리고 덩달아 님에 대한 실망도 더 커졌습니다. 8차 촛불대회를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국정원 문제에서 세금, 전세, 실업 등 민생 전반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지난 14일이 무슨 날인지 아시나요?
16년 전 그날 일본군 위안부이셨던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피해 사실을 공개리에 증언했습니다. 이전에도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수치와 치욕을 감수하면서까지 공개리에 증언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김 할머니의 증언 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이 잇따랐습니다. 결국 이 사안은 유엔 인권위가 ‘반인륜 행위’ 차원에서 진상조사에 나서는 등, 세계인의 양심과 관련된 문제가 되었습니다. 김 할머니의 용기있는 증언을 기리기 위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는 그날을 ‘위안부 기림일’로 정하고 올해 첫 행사를 가진 것입니다. 서울이 아니 9개국 17개 도시에서 함께 열렸죠.
첫 기림일을 기념하는 국제심포지엄이 그 전날 서울에서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 중국에 사시는 하상숙(85) 할머니가 참석해 이런 증언을 했습니다. “일본이 잘못했다고 할 때까지 저는 절대 못 죽습니다. 돈도 필요없습니다. 잘못했다는 일본의 사과만을 듣고 싶을 뿐입니다.” 할머니는 17살 때 일본인들의 꼬임에 넘어가 중국 우한의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습니다. 해방이 되어서도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무슨 낯으로 고향에 돌아갈거나….’ 그렇게 피멍을 안고 만리 타향에서 살아온 70년 가까운 삶, 가슴에 쌓인 분노와 원망과 슬픔이 얼마이겠습니까. 억만금을 준다고 그 한이 가시겠습니까, 그 눈물의 세월이 보상받겠습니까. 그런데 그 끔찍한 일을 저지른 일본에 아직도 피해자 할머니가 아직도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됩니까? 진작에 할머니들은 물론 세상의 모든 여성 앞에 그 끔찍한 죄를 사과했어야 할 일본은 오불관언하고, 할머니들은 사과를 기다리고….
광복절 기념사에서 님이 이렇게 말한 것은 그 연장선상일 겁니다. “과거를 직시하려는 용기와 상대의 아픔을 배려하는 자세가 없으면 미래로 가는 신뢰를 쌓기 어렵습니다.…일본의 정치인들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용기있는 리더십을 보여줬으면 합니다.” 지당한 말입니다. 좀더 단호한 표현을 바라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그 정도면 비겁한 일본 정치인들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면서 좀 켕기는 것이 없었나요? 혹시 일본 정치인들이 돌아서 웃을 것이란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나요?
지난주 봉급쟁이들의 속을 뒤집어놓은 세제개편안을 두고 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민경제가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인데 서민과 중산층의 가벼운 지갑을 다시 얇게 하는 것은 정부가 추진하는 서민을 위한 경제정책 방향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부의 책임자가 누구죠? 대통령이 아니라 경제부총리인가요? 정부의 세제개편안을 발표하고 국회로 넘길 때 최종 재가한 사람도 대통령이 아니라 경제부총리였던가요? 세제개편안에 잘못이 있다면 사과하고 바로잡을 사람은 부총리가 아니라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님은 전혀 딴 세상 사람처럼 말씀하셨죠. 설마 대통령이 아니라 왕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시민들도 이 염천에 거리로 나가고 싶은 생각 별로 없습니다. 그들을 내모는 국정원 사건에 대해서도 님은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모르네’ ‘내가 시킨 적 없네’ ‘나도 피해자네’, 이런 식으로만 말했습니다. 그리고 국회에 떠넘겼습니다. 하다못해 제 집 개가 행인을 물었다 해도 주인은 행인에게 사과하고 상처를 치료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개도 아니고, 국가의 최고정보기관이 국민의 주권행사를 방해하고, 그 결과 이득을 취한 사람이 뻔한데도 말입니다. 국정원을 수족처럼 부리는 건 님입니다. 아무리 귀엽다 해도 그 잘못을 두둔하고 감싸서는 안 됩니다. 진작에 과거를 치유하는 용기있는 리더십을 발휘했다면 이렇게, 시민들이 이 미증유의 무더위에 불덩이를 하나씩 안고 살아가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권력기구를 견제해야 하는데, 주인(구민)을 문 개의 인간 방패 노릇이나 하고 있는 여당 국회의원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거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무지하다고 해야 할지….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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