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강원도 양구로 비무장지대(DMZ·디엠제트) 생태환경 탐방을 다녀왔습니다. 환경부 주관의 디엠제트 60주년 세계생태환경대회의 일환이었죠. 60년간 인간의 간섭이 끊긴 그 곳은, 겉보기에만도 살아있는 것들의 천국이었습니다. 물론 남북 양쪽으로 길게 이어진 철책과 황톳길은 그곳이 여전히 가공할 파괴가 이루어질 수 있는 전장이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의 생태적 풍요는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1951년 휴전협상이 개시되고, 협상이 타결되기까지 2년 동안 현재의 비무장지대 일대는 현대사 최악의 살육전이 벌어졌습니다. 얼마나 폭탄을 쏟아부었는지 펀치볼 주변 산봉우리들은 높게는 1미터 가까이 고도가 낮아졌다고 합니다. 작은 봉우리 하나를 확보하기 위해 수천명이 죽어야 했던 곳입니다. 봉우리는 시뻘겋게 물들고 계곡엔 핏물이 흘렀습니다. 그런 곳에서 어떤 동식물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50여년간 인간이 봉쇄되자 개벽이 이뤄졌습니다. 환경부가 2008년부터 진행한 비무장지대 일원의 생태계 조사 결과, 약 106종의 멸종위기종을 포함해 동식물 5097종이 서식하고 있었습니다. 한반도 전체의 멸종위기종 가운데 43%, 전체 생물종의 13.4%가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멸종 직전의 산양이 가장 많이 살고, 사향노루는 오로지 그곳에서만 서식합니다.
올해는 비무장지대 관련 행사가 별나게 많습니다. 6·25전쟁 정전 60주년이었으니 그랬겠죠. 6·25전쟁 참전 20개국에서 온 대학생들은 디엠제트 생태평화벨트 동서횡단에 나섰고, 불교계와 기독교계는 걷기 염원 행사나 기도회를 열었고, 심지어 서울교육청도 사제가 자전거로 탐방하는 행사도 있었습니다. 님도 여기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지난 5월 미국의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디엠제트 세계평화공원 구상을 밝혔고, 그 뒤 통일부는 물론 문화부, 안전행정부까지 나서서 경쟁하듯 행사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우주가 60년을 주기로 운행한다고 믿었습니다. 정전 60년이니 한반도는 그 운명을 새로이 시작하는 출발점에 서 있는 셈이죠. 전쟁과 파괴와 대치의 한 갑자를 종식하고 평화와 생명의 새로운 갑자를 열어가려는 의지와 염원이 어느 때보다 큰 것은 이 때문일 겁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대개의 행사에서 좌와 우,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그 열쇳말을 평화, 생명, 생태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없는 처참한 살육전이 전개된 비극의 공간, 60년간 인간의 간섭이 배제되면서 원시적 생명을 회복한 곳, 그리고 평화가 가져올 미래의 풍요로운 생명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여주는 곳이니 다른 열쇳말이 끼어들 틈이 없긴 합니다.
그러나 이번 탐방에서 더욱 절실했던 것은 우리가 누리는 평화의 이중성입니다. 비무장지대의 평화란 건 사실 거센 여울에 휩쓸리고 있는 모래톱 같은 것이었습니다. 가볍게 스치기만 해도 떨어지는 들꽃 같기도 했습니다. 원시림 곳곳에는 수많은 악마의 눈들이 번뜩이고 있었습니다. 그 눈들은 저 생명의 노래를 가소롭게 비웃고 있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사라예보의 총성 한 방에서 시작한 것처럼 비무장지대의 평화와 생명도 한순간의 충돌로 산산조각 날 수밖에 없습니다. 지표면의 풍요로운 생명들과 달리 그 밑으로 굴착된 군사용 땅굴은 그 상징이었습니다. 평화와 생명을 순식간에 삼켜버릴 악마의 거대한 아가리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 현실 앞에서 평화, 생명, 생태를 입에 올린다는 것이 얼마나 유치하고 가소로운지….
님은 정전 기념식에서 다시 디엠제트 세계평화공원 구상을 밝히며 세계인의 관심과 참여를 호소했습니다. “정전협정 제1조 1항에 규정된 비무장지대(DMZ)는 최소한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과는 달리 세계 어느 곳보다 중무장된 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중무장지대가 되어버린 비무장지대의 작은 지역에서부터 무기가 사라지고, 평화와 신뢰가 자라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과거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고, 정전협정을 맺은 당사국들이 함께 국제적인 규범과 절차, 그리고 합의에 따라 평화공원을 만든다면 그곳이 바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멋진 소망입니다. 무기를 녹여 보습을 만들고 싶어했던 신동엽 시인의 소망을 보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석연치 않습니다. 놀림을 당하는 기분입니다. 이미 남북간에는 그야말로 힘겹게 조성한 평화지대가 있었습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이 그것입니다. 이명박 정부는 금강산을 폐쇄했고, 이 정부에 들어와서는 개성공단이 폐쇄의 위기에 몰려 있습니다. 최근 남북간에 개성공단 재개를 위한 협상이 있었지만, 사실상 결렬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남쪽은 폐쇄를 공언하고 있습니다. 누가 폐쇄의 빌미를 찾고 있는 건지?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은 그야말로 평화를 위한 작지만 위대한 전진이었습니다. 특히 개성공단은 평화의 확장성이 매우 큰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은 내팽개친 채, 수백만 수천만 발의 지뢰가 깔려 있고 최악의 살상무기가 집결된 곳에 세계평화공원을 조성한다고? 내가 잘못 들은 거야, 아니면 나를 놀리는 건가? 할 말이 없습니다.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 잘 돌아가게 하고, 이산가족 상봉부터 재개하시기 바랍니다. 디엠제트 평화 혹은 세계평화공원 따위는 그다음에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총소리 한 방이면 끝나는 그런 허깨비 그림으로 눈을 현혹해선 안 됩니다. 재발 방지 약속? 중요합니다. 남쪽 인력을 무조건 철수시킨 북쪽의 결정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둬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전쟁중입니다. 서로의 필요에 따라 싸움을 중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전쟁은 어떤 약속, 어떤 협정도 무효화할 수 있습니다. 보장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공단이든 관광이든 공원이든 평화의 지대를 확장하는 일입니다. 개성공단은 연평도 포격 와중에도 가동됐던 곳입니다. 보장을 날인한 문서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서로에 대한 믿음, 신뢰 그리고 필요 때문이었습니다. 신뢰와 필요를 늘려가야 하는 겁니다. 어제 통일부 장관이 ‘마지막’이라며 개성공단 7차 회담을 제안했더군요. 세상에, 회담을 하는데 이번이 마지막이야 라고 을러대는 게 어디 있습니까. 거기에 다른 한편으론 인도적 지원까지 끼웠습니다. 좀 지저분해보이지 않습니까? 결렬의 책임을 회피할 명분용이거나 아니면 물자를 미끼로 굴복을 요구하는 것 말입니다.
비무장지대는 전쟁 상태를 상징하는 공간입니다. 평화를 위한 실효성 있는 조처는 회피한 채 비무장지대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속이는 겁니다. 지금도 한쪽은 땅굴과 핵무기에 집착하고, 다른 쪽은 봉쇄를 통한 고사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이런 말이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개성공단도 폐쇄하려 하면서 무슨 평화공원이지?’ ‘뭘 모르는 거야, 아니면 속이려는 거야?’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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