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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착안대국 착수소국 / 김영배

등록 2013-07-21 18:59수정 2013-07-21 19:02

김영배 경제부장
김영배 경제부장
바둑을 배운 건 군 복무 시절 입대 동기를 통해서였다. 바둑 입문 나이로는 비교적 늦은 시기였던 때문인지 책으로 포석을 공부하는 등 나름대로 애를 썼지만 급수는 지금도 그야말로 ‘콩 뿌리는’ 수준의 하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바둑에 대한 애정은 깊어 누가 취미를 물어보면 등산과 함께 바둑을 나란히 앞자리에 꼽는다. 한때 온라인 바둑에 거의 중독되다시피 해 토요일 오전을 꼬박 날린 탓에 아내한테서 핀잔을 들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7일, 부처 내 소식망(인트라넷)으로 전체 직원들에게 쓴 편지에서 ‘착안대국 착수소국’(着眼大局 着手小局)이란 바둑 용어를 썼다는 전언에 내심 반가웠다. 바둑을 화제에 올리면 무턱대고 일단 좋아지는 게 내 오랜 버릇이라 현 부총리에 대한 호감 지수를 높여 보리라 마음먹었다.

현 부총리는 그 용어를 쓰면서 ‘그림은 크게 그리되, 실행은 디테일하게 하라’는 격언이란 설명도 친절하게 덧붙였다. “최근 우리 부의 정책 리더십에 대한 여러 지적이 있었습니다만, 일희일비하지 말고 소중하게 경청합시다”라는 추가 주문에서 엿볼 수 있듯 현 부총리의 격언 거론은 청와대와 새누리당 등 여권 쪽에서 자신에 대한 리더십 문제를 제기한 데 대한 대응 성격이었다.

현 부총리가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안경을 닦아드려야 하는지”라는 나름 센스 있는 표현으로 ‘역할 부재론’을 반박한 지 하루 만에 바둑 격언까지 들어 가며 리더십 부재 주장을 들이받아야 할 정도로 그에 대한 여권 쪽의 공세는 거셌다. 공격의 주체가 넉 달 전 부총리 취임 때는 별 문제 제기를 하지 않던 여권 쪽이었다는 사실은 꽤 흥미로운 대목이다. 현 부총리가 새 정부 경제정책 수장의 후보로 올랐을 때 집중적으로 자질 문제를 거론할 정도로 반대했던 쪽에선 오히려 잠잠하다 할 정도로 별 시비가 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경제 상황이 나쁘긴 매한가지이며, 특별히 달라진 사정이랄 게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왜들 저러지?’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던 여권의 현 부총리 흔들기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부총리 자리를 갈아치우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고 보기엔 취임 뒤 흐른 시일이 너무 짧다. 더구나 임명권자인 박근혜 대통령이 각계의 반발에도 밀어붙인 인사였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지금 시점에서 현 부총리를 경질할 경우 박 대통령의 인사 실패를 자인하는 격이 되기 십상이다.

결국은 정책 기조를 조금 더 ‘우향우’ 시키겠다는 의도에서 부총리의 리더십 논란을 일으켰다고 풀이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기업 하기 좋게 규제를 좀더 팍팍 풀고, 부동산 시장 살리는 정책을 펴보란 말입니다. 아, 부자가 돈을 써야 경제가 돌아가고 성장을 해야 분배도 하지요.’ 리더십 문제를 거론한 이들의 속내는 대략 이런 게 아니었을까? 재계나 여권 쪽에선 능히 제기할 수 있을 법한 주장이다.

정작 중요한 건 현 부총리의 생각일 텐데, 그가 리더십 논란에 휘말려 지난 정부 시절에 이미 아무런 효과를 못 내고 좌초한 그 낡은 정책 틀을 다시 끄집어내고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는 쪽으로 더 내달려가는 것만은 피하기를 바랄 뿐이다. 바둑으로 치면 현 정부는 이제 포석을 끝내고 반상 곳곳에서 슬슬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일 시기에 접어들었다. 현 부총리가 착안대국을 잘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되 착수소국이라도 잘해서 한판의 바둑을 훌륭하게 마무리짓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은 나 또한 그 착수에 따른 영향을 받는 한 명의 국민이기 때문이다.

김영배 경제부장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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