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승 경제부 정책금융팀장
“국내 은행도 글로벌 투자은행으로 성장해야 한다. 자산 200조원대 은행 3~4개로 대형화하는 게 필요하다.”
10여년 전 금융권을 취재할 때, 전문가와 당국자들한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말이다. 대형화가 금융산업 발전의 초석이라는 취지다. 당시 시중은행 자산 규모는 50조~100조원 수준이었다. 시나리오는 현실이 됐다. 국내 은행은 지속적인 인수·합병을 거쳐 자산 300조원 안팎의 대형 은행(금융지주 기준) 5곳으로 정리됐다. 덩치 기준으로 세계 80위권이다.
대형화가 수단이라면, 과연 목표는 달성됐을까. 국내 은행의 수익 구조는 덩치가 커진 이후에도 거의 달라진 게 없다. 예대마진과 대출에 의존해 이익을 남기는 평범한 상업은행일 뿐이다. 국내 은행의 국외 투자 수익 비중은 1~2% 수준이다. 중국·동남아 등 신흥시장 진출 역시 10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오히려 국내 기업금융은 사실상 필요 없는 상태가 됐다. 삼성전자·현대차·포스코 등 최대 고객들은 더 이상 국내 은행을 상대하지 않는다. 필요한 자금은 외국에서 직접 채권을 발행해 조달한다. 국제적 규모의 딜(거래)에 국내 금융사는 서브플레이어(2차 주간사)로도 잘 끼워주지 않는다. 우리 정부가 발주하는 계약조차 그렇다. 좁디좁은 국내에서 고래들끼리 싸우는 모양새요, 글로벌 투자은행은 말 그대로 언감생심이다.
불행히도 국내 금융산업은 ‘금융의 삼성’을 기대하기엔 원천적 한계가 뚜렷하다. 금융산업의 속성은 규제와 인허가다. 선진국·신흥국을 가리지 않고 어느 나라나 금융업에 관한 한 진입 장벽이 높고 다양하다. 자기 나라에 공장 짓고 투자를 하면 언제든 두 손 들고 환영하는 제조업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한국 금융의 신용도는 어떤가. 우리나라는 북한 문제 등 이른바 컨트리 리스크(국가 위험도)를 피할 수 없는 처지다. 국제 금융시장이 출렁일 때마다 외화자금 시장에선 달러가 빠져나가고 금융회사 채권에 붙는 가산금리는 쑥 올라간다. 삼성전자보다 더 높은 금리를 주고 자본을 조달하는 게 현실이다. 제조업으로 치면 원가가 높고 이마저 들쑥날쑥한 셈인데, 어떤 바이어가 이런 업체와 거래를 하겠는가. 글로벌 영업이 가능한 인적·조직적 네트워크 또한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삼성전자는 국내에서 한 달 전 수출한 휴대전화가 지금 어느 나라의 어느 대리점에 입고돼 있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삼성의 비교 우위는 제조 능력보다는 경쟁사를 압도하는 영업망과 물류 시스템에서 나온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이런 시스템은 십수년간의 시장 개척이 뒷받침된 것이다.
더 결정적이고 본질적인 한계는, 기축통화국이 아니라는 점이다. “신흥국 은행 중에 인터내셔널 뱅크가 있는지 한번 둘러보라. 달러와 유로, 엔화 외에는 화폐 경쟁력이 없다. 해외 금융사를 인수하더라도 핵심 인력이 빠져나가면 경쟁력이 없다.” 은행장을 지낸 한 지인의 말이다.
우리은행이 매물로 나올 예정이니 머잖아 자산 규모 700조원대, 세계 50위권의 메가뱅크가 탄생할지도 모르겠다. 독과점 문제와 시스템 리스크가 커진다는 우려는 차치하고라도, 더 이상 글로벌 투자은행이니, 인터내셔널 뱅크니 하는 허망한 목표를 내세우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금융의 기본은 자금 중개와 신용 관리다. 현재 우리나라 가계신용대출의 4분의 1, 40조원은 연 20%를 웃도는 고금리다. 기준금리 연 2%대의 초저금리 상황에서 말이다. 이들의 이자율을 절반 정도만 낮춰도 연간 5조원가량 개인소득이 늘어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선진국 그룹 중에 우리처럼 신용별 금리 격차가 큰 곳은 없다. 금융의 규모와 효율이 아니라 기본을 되돌아보는 게 우선이다.
김회승 경제부 정책금융팀장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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