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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배가 산으로 가는 한국 정치 / 백기철

등록 2013-07-04 19:06

백기철 논설위원
백기철 논설위원
단재 신채호는 조선시대 사색당쟁의 심각성을 ‘토붕와해’란 말로 표현했다. 말 그대로 흙더미가 무너지고 기왓장이 부서지도록 싸웠다는 것인데, 당쟁으로 나라가 사실상 결딴났다는 말이다. 신채호가 오늘날 살아서 엔엘엘 논란을 둘러싼 정치권 행태를 보았다면 조선의 당쟁과 흡사하다 했을 것이다. 여야가 엔엘엘 논란을 벌이는 와중에 나라의 외교가 결딴났고 국격이 땅에 떨어졌다.

국회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등 자료 일체를 열람하고 공개하기로 의결한 것은 다수결 정치의 폐해를 잘 보여준다. 여야 지도부 방침에 따라 3분의 2가 넘는 의원들이 꼭두각시처럼 버튼을 눌렀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동상이몽으로 담합한 것인데, 정략에 눈이 어두워 나라라는 배를 산으로 끌고 온 형국이다.

대화록을 한번이라도 훑어봤다면 국정원의 전문 공개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는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이웃 일본과 중국, 그리고 미국이 대화록을 보면서 얼마나 코웃음을 칠지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북한 김정은 제1비서가 아버지의 육성이 통째로 드러나는 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답답하다. 남북 정상이 만나 민족의 장래를 이야기한 대화 내용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 자체가 민족의 수치다. 그것도 음지에서 일한다는 국정원이 백주에 그런 짓을 했다는 건 세계 정보기관 역사상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일이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정치권이 대화록 전문뿐만 아니라 정부의 사전·사후 회의록, 정상회담 음원까지 공개하자고 하고 있으니 나가도 너무 나갔다. 이런 식이라면 엔엘엘 관련 그간 정부 논의와 남북 접촉을 다 까발려야 할지 모른다. 정상회담에 관여한 현 정부 외교안보 라인 인사들을 포함해 대대적인 청문회를 벌여야 할 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회담 육성이 전파를 타고 흐른다고 상상해 보라. 그야말로 브레이크 없는 외교적 자폭행위요, 국가적 망신이 따로 없다.

사태가 여기까지 온 데에는 그야말로 뜬금없이 엔엘엘 카드를 꺼내든 여권의 책임이 절대적이다. 대선 때 크게 써먹은 엔엘엘을 또다시 꺼낸 것은 정치 도의상 야비할뿐더러 효과적이지도 않다. 정권 초 남북관계와 4강 외교를 정력적으로 추진해야 할 상황에서 막가파식 폭로는 고스란히 정권에 부담으로 돌아올 뿐이다. 전문 공개 이후 국민 절반 이상이 노 전 대통령의 엔엘엘 포기 발언은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엔엘엘 카드는 자충수에 가깝다.

그렇다고 야권이 이참에 다 까자는 것도 책임 있는 자세는 아니다. 당시 정부를 이끌었던 세력이라면 그에 걸맞은 인내와 절제를 보여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이 회담에서 거친 언사로 불씨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문재인 전 대선 후보가 모두 공개해 결백을 밝히자고 한 것은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당이 나서서 밀어붙일 일은 아니었다.

엎질러진 물이라지만 조금이라도 주워담아야 한다. 막무가내식 정쟁으로 나라를 거덜낼 수는 없다. 어떻게든 국격이 훼손되고 외교의 기틀이 무너지는 일은 막아야 한다. 정쟁은 이제 할 만큼 했다. 무엇보다 여권의 책임이 크다. 이렇게 나라를 만신창이로 만들어놓고 무슨 신뢰고, 무슨 행복을 말할 수 있나. 문제를 만든 쪽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국회 의결이 된 이상 자료는 받아놓되 열람 및 공개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보는 게 좋다. 남재준 국정원장의 거취도 고민할 때다. 남 원장이 이번에 보인 행태는 무슨 보수우익단체의 행동대장이지 정보기관의 수장과는 거리가 멀다. 나라 꼴이 더 우스워지지 않도록 박근혜 대통령과 여당이 슬기롭게 대처하길 주문한다.

백기철 논설위원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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