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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공정 금리’는 어떨까? / 김회승

등록 2013-06-11 19:14수정 2013-06-11 21:14

김회승 경제부 정책금융팀장
김회승 경제부 정책금융팀장
30대 여성이 신용카드 여섯 장을 만들었다. 각각 현금서비스 5000만원에 총 이용한도 1억원짜리다. 한꺼번에 현금서비스 3억원을 받아 잠적했다. 그는 미혼의 무직자였다.

10여년 전 있었던 일이다. 중국집 할인쿠폰 나눠주듯 길거리에서 카드를 발급하던 때다. 집 보는 초등생을 꾀어 엄마 주민번호를 알아내 우편으로 보내주는 경우도 있었다. 실명과 주민번호만 있으면 됐으니, 친구 이름으로 카드를 발급받아 곧장 파기하는 영업자들도 나타났다. 직업이나 소득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국 카드 거품은 터졌고 수백만명의 신용불량자가 양산됐다. 신용회복위원회라는 대한민국 최초의 개인채무조정 기구도 이때 탄생했다.

최근 국민행복기금이라는 또다른 개인채무조정 프로그램이 론칭했다. 카드 사태 때는 국내 신용거품이 문제가 됐다면, 이번엔 실물경제 침체에 따른 개인 도산의 여파다. 연유는 다르지만 한계 채무자를 위한 구제금융이 10여년째 이어지고 있는 셈인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도덕적 해이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개인채무조정에 대한 도덕적 해이 논거는 대개 이런 것이다. 빚을 안 갚고 버티는 심리가 확산되고, 고의적인 악성 채무자가 늘어난다. 묵묵히 빚을 갚아온 채무자와의 형평성을 해쳐 금융 신뢰가 무너진다. 연체 증가가 은행 부실로 이어져 금융 시스템을 위협할 수도 있다. 특히 기업채무조정에는 비교적 관대한 전문가들도 개인채무조정에는 유난스럽게 도덕적 해이를 들먹인다. 여기에 금융기관 책임론 등을 거론했다간, 금융의 기본을 모르는 문외한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사실관계가 틀린 건 짚고 넘어가야겠다. 국민행복기금 신청자 실태를 살펴보자. 사전 신청자 10만여명의 평균 채무액은 1350만원, 연소득 2000만원 미만이 10명 중 7명이다. 과거 카드 신용불량자 워크아웃 때도 비슷했다. 월 소득 150만원 이하가 전체의 80%, 평균 부채는 2000만원 이하가 56%다. 소액 신용대출을 받았다가 어려움을 겪게 된 저소득층이 채무조정의 실수요자란 얘기다. 고액의 빚을 일부러 연체해 탕감받으려는 도덕적 해이가 만연할 것이란 걱정만큼은 기우인 셈이다.

문제는 이런 ‘채무조정 대기자’들이 갈수록 늘어날 수 밖에 없는 신용대출 시장구조다. 외환위기와 카드사태,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국내 은행은 서민금융을 사실상 포기했다. 리스크 회피로 건전성은 강화됐는지 모르지만, 저소득·저신용자는 지속적으로 은행 밖으로 내몰려왔다.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한 이들은 곧장 거대한 ‘이자 절벽’에 맞닥뜨리게 된다. 연 10%대 초중반의 중금리 대출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탓에, 연 20%를 웃도는 고금리 대출로 내몰리는 것이다. 금리 단층 현상이다. 지난해 말 기준 가계신용대출의 4분의 1은 연 20%를 웃도는 고금리다. 결국 은행들의 빈자리는 대부업체들이 메우고 있다. 산와머니, 러시앤캐시 등은 10년 전 200억원 안팎의 대출 자산으로 시작해 지금은 영업수익이 5000억원을 넘어섰다. 대부업체의 급성장은 서민들이 빚내서 빚 갚느라 커진, 말 그대로 ‘눈물의 시장’인 셈이다.

금융당국이 뒤늦게 중금리 상품을 내놓으라며 팔을 비틀고 있지만, 은행들은 관심도 능력도 없는 게 현실이다. 최근에야 저신용자 신용평가 모델을 만들겠다고 시늉을 내는 수준이다. 금융은 종종 혈관에 비유된다. 건강한 경제를 위해서는 실핏줄까지 곳곳에 돈이 흐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대출 문턱을 낮춰 빚내서 빚 갚기를 수월케 하는 게 근본적 해법은 아닐 게다. 하지만 시장에서 신용금리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관치의 힘으로 ‘공정 금리’라도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금융 문외한의 단상이다.

김회승 경제부 정책금융팀장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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