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 경제부장
5월23일 <한겨레> 지면 계획을 결정하는 편집국장 주재 회의(편집위원회)에서는 용어 선정을 둘러싼 논란이 일었다. 온라인 매체 <뉴스타파>가 ‘조세피난처 프로젝트’의 1차 취재 결과를 발표한 이튿날이었다.
발단은 조세피난처라는 용어가 과연 적절한가라는 편집국장의 문제제기였다. 오전 회의에서부터 대부분 ‘피난’은 적절치 않다는 의견을 냈다. 재난을 피해 재산을 안전한 곳으로 옮긴다는 뜻의 피난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한다는 점에서였다. 적법한 과세 행위를 재난으로 여기게 할 수 있다는 지적도 같은 맥락이었다.
대안으로 제시된 용어는 조세회피처와 조세도피처였는데, 쉽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회피는 너무 밋밋해 굳이 바꾸는 의미가 없는 듯하다는 의견이 나왔고, 도피는 부정적인 어감이 너무 강해 자칫 합법적인 행위까지 매도할 수 있다는 지적이 맞섰다.
논란은 오후 회의 때까지 이어졌다. 당시 회의에서 나는 현장 기자의 의견을 반영해, 조세피난처가 법률(국제조세조정에 관한 법률)에 올라 있는 공식 용어이니 그대로 쓰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결국 내 의견은 소수파로 밀렸고, <한겨레>는 조세피난처 대신 조세회피처로 통일해 표현하기로 결정했음은 24일치 3면에 보도한 대로다. 그날 회의 뒤 조세회피처 문제를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며, 내가 법 형식에 너무 얽매여 문제를 느슨하게 본 것 아닌가 반성했다.
뉴스타파의 첫 발표가 언론 보도를 통해 넓게 파장을 일으킨 것에 걸맞게 연쇄 폭발을 일으킬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만 볼 때는 담긴 내용이 촘촘해 보이지는 않는다. 1차로 명단에 오른 이들에 관한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발표 자료는 국내의 당사자와 조세회피처 현지의 법인설립 대행기관 사이에 오간 이메일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탈세나 비자금 조성 따위로 연결지을 뚜렷한 실마리는 없는 듯하다. 영문 이름을 담고 있는 법인설립등록증 외에 재산 이동에 관한 움직임이 일부 포착됐다는 정도이다.
뉴스타파의 추가 발표 내용이 어떻든 탈세 따위의 불법행위를 드러내는 것은 결국 국세청의 몫일 터이다. 국세청은 역외탈세 자료 확보를 위해 미국 과세당국과 협의를 벌이고 있으며, 뉴스타파 못지않은 자료를 이미 확보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으니 기대를 가져봄 직하다. 국세청은 역외탈세를 추적하는 데 이미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뉴스타파의 발표와 국세청의 조사 과정에서 불법 비리가 명징하게 드러나기를 고대하는 것 못지않게 누명을 쓰는 개인이나 기업도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조세회피처에 투자하는 것 자체를 불법으로 볼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다만, 기업 쪽에서 ‘불법만 아니라면 다 괜찮은 건가’라는 자문을 해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불법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도 법 잣대가 아니라 ‘시민의 눈’으로 봤을 때도 떳떳한 것인지, 그 행위가 신문 1면에 낱낱이 보도되더라도 낯부끄럽지 않을지 돌이켜보는 게 기업의 장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계를 담당하는 후배 기자들한테 가끔 이런 부탁을 한다.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의 기업은 무엇보다 이윤을 추구하는 집단이며, 법만 엄밀하게 지킨다면 일단은 뭐든 할 수 있는 존재임을 기업 이해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반대로 기업을 홍보하는 이들한테는 ‘아무리 자본주의 체제라고 해도 법만 지키면 다 된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궁극적으로 기업에도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곤 한다. 거꾸로 뒤집힌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양쪽의 그런 인식 속에서 이해의 교집합이 넓어지고, 기업이 애정과 존경의 대상으로 격상될 것이라고 믿는다.
김영배 경제부장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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