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섭 오피니언부장
머잖아 완쾌될 거라며 매일 환자를 안심시키던 의사가 있었다. 하루는 맥박이 더 좋아졌다고 하다가, 다음날은 배변 상태가 나아졌다고 하고, 그다음엔 땀 흘리는 게 달라졌다고 하며 듣기 좋은 말로 환자의 의심을 눌렀다. 어느 날 환자의 친구가 병문안을 왔다. “병세가 어떤가?” 환자가 대답했다. “나는 날마다 나아지고 있는데, 그 때문에 죽어가고 있네.”
엉터리 의사와 죽어가는 환자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은 말년의 이마누엘 칸트(1724~1804)다. 칸트의 이야기는 지난 5년 동안 이명박 정부가 ‘전략적 인내’라는 말로 연출했던 사태에 대한 절실한 비유로 들린다. 참으면 좋아질 거라고, 변화가 올 거라고 하면서 남북관계를 죽음으로 밀어 넣었다. 그 결과가 살벌한 전쟁의 언어가 난무하는 오늘의 한반도다.
나라들 사이 끝없는 적대와 불화와 전쟁을 목격했던 칸트는 노년에 전쟁의 본성과 평화의 도래 가능성에 대해 오래 숙고했다. 논문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에서는 전제군주들의 전쟁놀음을 비판하기도 했다. 칸트의 언어는 신랄하다. 군주는 전쟁이 나더라도 연회와 사냥의 즐거움을 누리는 데 지장을 받지 않는다. 멀찍이 떨어져 전황을 보고받을 뿐이다. 전쟁을 정당화하는 일은 외교부서에 맡겨두고 전쟁 게임만 즐기면 된다. 칸트는 전쟁이 군주 자신의 위엄과 용맹을 드러내는 데 유용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전쟁을 결심하는 것이야말로 군주의 용기를 보여주는 물증인 것이다. 그리하여 군주가 용맹을 자랑하는 사이에 죽어나는 것은 전쟁터의 백성들이다.
전제군주가 사라진다면 전쟁도 사라질까. 칸트는 소박한 낙관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토머스 홉스처럼 말한다. “자연상태는 전쟁상태다.” 그가 관찰한 인류는 ‘비사회적 사회성’을 본성으로 한다. 서로 어울려 살고자 하는 ‘사회성’도 있지만, 꼭 그만큼의 강도로 서로 배척하고 적대하는 ‘비사회성’도 심장을 채우고 있다. 개인도 국가도 갈등과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끝없는 진보를 열망하고 영원한 평화를 갈구하는 칸트는 여기서 절망하지 않는다. 그는 ‘인류의 보편사’를 조망해 봄으로써,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출구를 찾아낸다. 서로 사귀고 통하는 인간의 본성이 창출해낸 상업과 교역이 칸트가 발견한 길이다. “상업정신은 전쟁과 양립할 수 없다.” 상업의 발전과 교역의 확대는 두 나라에 모두 이익이 된다. 단적으로 말해, 도덕의 힘이 아니라 화폐의 힘이 전쟁을 막고 평화를 가져온다.
이 대목에서 칸트가 자본의 본성을 보지 못했다고 타박만 할 것은 아니다. 확실히 교역의 발달은 전쟁을 없애지 못했다. 아니, 더 많은 이윤과 착취와 수탈의 기회를 얻으려는 자본의 야망이 지난 세기의 세계대전을 촉발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좀더 넓은 시야에서 보면 교역의 발달로 인한 상호 의존이 우연적이고 감정적인 전쟁 발화 요소들을 줄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라들 사이의 경제적 결속은 전쟁의 충동을 가라앉혔다.
남북 화해와 협력의 ‘최후 보루’인 개성공단이 폐쇄 위기에 몰렸다. 한반도 평화가 결딴날 판이다. 이런 상황에서 칸트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최후 보루’가 유실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보루를 열 곳, 스무 곳으로 늘리라고 권할 것이다. 2007년 10월4일 남북 정상끼리 합의한 ‘서해평화협력지대 창설’을 비롯한 남북 경제협력에 해법이 있다. 전쟁의 언어를 치우고, 평화의 보루를 세우자.
고명섭 오피니언부장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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