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선희 경제부 기자
“어, 어디 있지?”
지난달 21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국정과제를 발표했다. 그런데 252쪽이나 되는 자료 어디에도 ‘경제민주화’라는 단어가 보이질 않는다. 5대 국정과제에서 빠지고 하위 전략 중 하나로 밀렸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하위 전략 중에도 눈에 띄질 않는다. 자료를 한참 뒤적인 뒤에야 관련 공약들-일감 몰아주기 억제, 부당 단가인하 방지, 금산분리 등-이 ‘원칙이 바로 선 시장경제 질서 확립’이라는 제목 아래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토사구팽이냐?”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 다르다더니….” 온갖 험악한 비판이 쏟아졌고, 경제민주화라는 용어는 나흘 뒤 대통령 취임사에서 ‘부활’했다.
인수위 쪽은 “표현이 달라졌을 뿐 구체적 공약은 모두 들어 있다”고 항변했다. 맞다. 각론들은 공약집과 큰 차이가 없다. 의문이 더 커진다. 내용이 같은데 왜 굳이 표현을 바꿨을까? 강석훈 인수위원은 “‘원칙이 바로 선 시장경제’가 더 광의의 개념이다”라고 설명했다. 진실은 그 반대로 보인다. ‘어디까지 튈지 모르는’ 경제민주화 개념을 ‘시장경제 질서 확립’으로 한정해, 그 ‘불온함’을 거세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널리 알려진 대로 ‘경제민주화’는 헌법에서 유래했다.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헌법 119조2항)
경제민주화는 ‘모호한’ 개념이다. 그 원칙하에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이를 ‘절차적 경제민주화’와 ‘실질적 경제민주화’로 나눈다. 전자는 공정한 시장경쟁이 중심에 놓인다. 재벌의 소유구조 개선, 재벌·대기업의 불공정거래 제재 등이 포함될 것이다. 후자는 ‘파이의 공정한 분배’가 중심이다. 기업과 노동자 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고소득층과 중산층·서민 간의 소득격차가 너무 커지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이를 위해 비정규직 차별 철폐, 노동자의 경영참여, 초과이익공유제, 연대임금, 부자증세 등 다양한 방안이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절차적 경제민주화의 의미도 크지만 여기서 그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의 지적대로 헤비급과 라이트급을 붙여놓고 “지금까지는 헤비급이 발까지 썼지만 이제는 안 돼. 주먹만 써야 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여권이 경제민주화를 절차적 부분으로 국한시키는 것은 대선 전부터 계속돼온 흐름이다. “우리 의미는 원래 그거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중요한 점은 국민들의 이해는 달랐다는 것이다. 많은 국민들은 막연하게나마 현재 겪고 있는 소득격차·차별·양극화를 해소해주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새누리당도 이런 기대를 알기에 굳이 ‘경제민주화’라는 용어를 쓴 것 아닌가?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민주화보다 며느리도 그 뜻을 모른다는 ‘창조경제’를 점점 앞세우는 것, 경제부처 장관들로 기용한 인물들의 면면 등을 보면 ‘원칙이 바로 선 시장경제’나마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권 일각에서는 “대선을 치르고 보니 사실 ‘경제민주화’보다는 ‘한강의 기적’이 더 표에 도움이 됐다”는 분석까지 나오는 모양이다.
이런 분석이 정확한 것인지 알 수 있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다행히 우리는 경제민주화는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형식적이나마) 정치민주화는 이뤘기 때문이다. 올해는 두 번의 재보궐선거, 내년에는 지방선거가 치러진다.
안선희 경제부 기자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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