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전쟁은 집단적 오판과 자만심의 결과라고 한다. 흔히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집단들은 자신의 역량을 과대평가하고 상대방의 힘을 과소평가한다. 자신들은 반드시 승리하며 상대방은 무릎을 꿇고 말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지도자들은 상대방에 대한 적의와 흥분, 애국심을 잔뜩 고취한다. 광기 어린 여론에 올라타 자신을 통제할 힘을 잃은 상태에서 심각한 결정을 하기도 한다. 결과는 참담한 비극으로 끝난다.
미국의 여성 언론인 바버라 터크먼이 1962년에 지은 책 <8월의 포성>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8월 한달 전쟁에 관여한 사람들의 관계와 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했다. 전쟁은 철저하게 ‘엇갈린 의도와 오해, 그리고 부주의’의 결과로 다가왔다. 가령 독일의 빌헬름 2세는 독일이 군사력으로 어떤 나라도 단시일에 격파할 수 있다고 믿었고, 프랑스는 1870년의 보불전쟁 패배로 잃은 알자스로렌 지역을 회복할 수 있겠다며 은근히 전쟁을 기대했다. 그 밖의 크고 작은 세력들이 나름의 계산을 토대로, 호랑이 등에 타고 내달리던 끝에 전쟁이 벌어졌다. 유럽은 참화에 휩싸였고 한 세대를 잃고 말았다.
<8월의 포성>은 그 뒤 정치 지도자들의 교훈서가 되었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일촉즉발일 때 그해 막 출간된 <8월의 포성>을 읽었다고 한다. 그는 어느 10월의 화요일 국가안전보장회의를 끝낸 뒤 집무실에서 특별보좌관 케네스 오도널, 연설문 보좌관 테드 소런슨, 동생인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케네디는 “나는 뒷날 <10월의 미사일> 같은 책을 쓰게 하지는 않겠다” “우리는 판단착오를 범해서는 안 되고, 적이 의도하지 않았던 혹은 예견되지 않았던 방향으로 대응하도록 강압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한테 요구되는 최고의 지도력은 ‘냉정과 절제’임을 알리는 사례다.
한반도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나름대로 차분하게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엊그제 국무회의에서 “북한의 도발에 강력하게 대응해야겠지만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작동되도록 하는 노력도 멈춰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북 안보태세를 확고히 하되, 한쪽으로만 치닫지 않고 외교와 협상의 언어를 아울러 제시한 것이다. 대통령과 조율한 듯 류길재 통일부 장관도 취임사에서 “상황이 아무리 엄중해도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데 필요한 대화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가 자세를 올바르게 잡은 것이다. 지금은 국가 지도자가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확고하게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때다. 북한이 시위 강도를 높인다고 호들갑만 떠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무능한 자가 전쟁의 공포를 자극하는 법이다. 지혜로운 지도자는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는 방법을 찾는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비해 메시지 관리가 한결 나은 점도 다행스럽다. 이 전 대통령은 북한의 움직임에 덩달아 춤추다가 남북관계를 풀어볼 기회를 놓쳤다. 한-미, 한-중 관계를 비롯해 우리의 외교적 발언권도 약화되었다. 무엇보다 오늘날 남북관계가 악화된 데는 이명박 정부의 책임이 절반 이상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남북 긴장이 조성되자 보수 논객들은 대통령이 팔을 걷어붙이라고 연일 촉구하고 있다. 북한이 핵을 갖더라도 망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라면서, 그것이 용기라고 선동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그릇된 선동에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나아가 박 대통령이 원론적 자세 잡기에 그치지 않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더욱 구체화해 나가기 바란다.
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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