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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헌신과 희생’이란 위험한 덫

등록 2013-03-04 19:23

김종구 논설위원
김종구 논설위원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가 결국 사퇴했다. 김 후보자가 밝힌 사퇴의 변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자신이 미국에서 성취한 모든 것을 희생하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려 했으나 정부조직 개편안을 둘러싼 ‘정치권의 혼란상’, 특히 야당의 몰상식한 태도에 실망했다는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김 후보자가 미래창조과학부를 한번 맡아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그를 둘러싼 각종 의혹이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명쾌히 해명되는 것을 전제로 함은 물론이다. 과연 그가 미국에서의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깜짝 놀랄 만한 발상의 전환을 보여줄지, 외국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조직 운영을 원만히 해나갈지 등을 확인해보고 싶은 호기심도 있었다. 그러나 사퇴 회견을 접하며 그런 기대가 잘못된 것이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김 후보자가 우리 정치 현실에 좌절했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가 살아온 미국의 요즘 정치 상황은 우리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오바마 대통령과 공화당 사이의 의견 대립으로 대규모 예산 자동삭감(시퀘스터)이 발동됐고, 연방정부 폐쇄 사태 가능성까지 우려하는 형편이다. 이런 미국의 상황을 모를 리 없는 그가 유독 한국 정치 상황 탓만 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더욱이 정부조직 개편안을 둘러싼 지금의 여야 대립 속에는 방송의 중립성과 독립성 문제 등 그가 이해하기 힘든 한국적 상황이 녹아 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이 야당 탓부터 하는 태도로는 장관직을 맡았어도 숱한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사퇴 기자회견을 접하며 가장 거슬린 점은 장관직을 ‘희생’으로 여기는 대목이었다. 그의 말 속에는 ‘내가 미국시민권을 버리면서까지 한국을 위해 봉사하겠다는데 한국민들이 감지덕지는 못할망정 감히 싫다 좋다 할 수 있느냐’ 하는 불쾌감이 배어 있었다. 물론 한국으로 되돌아오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가 장관직을 일종의 기부 행위나 봉사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입으로 헌신을 강조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심정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사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헌신과 봉사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듣기 거북하고 역겨운 일도 없다. 그런데도 고위 공직자로 임명된 사람들 입에서는 곧잘 “마지막 봉사” 따위의 말이 튀어나온다. 이런 것이 단지 ‘한번 해보는 말’임을 잘 아니까 그냥 지나치는 것이지 실제 진심이 그렇다면 참고 넘어가기 곤란하다. 고위 공직자가 자신이 맡은 자리에 대해 고맙고 영광스럽고 과분하게 여기는 겸손한 자세가 없이는 오만과 편견으로 빠지게 돼 있다.

헌신과 희생, 봉사 의식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는 바로 대통령들이다. 조금씩 개인적 차이는 있지만 역대 어느 대통령치고 이런 인식을 표출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한 나라의 운명을 책임진 자리에 오르게 되면 저절로 걸리게 되는 대통령들의 ‘직업병’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증상의 심각성 정도이다. 헌신과 희생 의식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그것은 자기연민, 자아도취, 자기최면이 된다.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지도자들의 자아도취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돌파력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과 조직을 망치는 독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교만심, 외부와의 공감을 거부한 채 자신이 원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타인으로부터 배우지 않으려는 폐쇄적 태도가 모두 거기서 비롯된다는 얘기다.

박근혜 대통령의 헌신과 희생 의식은 최근 청와대의 주인들 중 단연 으뜸으로 보인다. 정부조직 개편안 문제와 관련한 대국민 담화에서도 이런 증상은 확연히 감지됐다. 국가나 국민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지만 원래 성숙한 사랑은 친밀감, 열정, 헌신이 함께 가야 하는 법이다. 단순한 친밀감이나 열정에만 그치는 사랑도 불완전하지만 특히 친밀감이 없는 일방적 헌신은 위험한 사랑이 되기 쉽다. 박 대통령은 ‘사랑하는 국민’을 상대로 한 담화라면서도 따뜻하고 친밀한 표정은커녕 싸늘하고 험악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박 대통령의 그런 표정의 밑바탕에 철갑처럼 단단히 무장된 희생과 헌신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섬뜩해진다.

김종구 논설위원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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