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선희 경제부 기자
2011년 무상급식 논란이 한창일 때 기획재정부의 한 국장과 복지 문제를 놓고 이런저런 말을 나누었다. “정말 ‘폭탄’은 노인복지예요. 두고 봐요. 아동 쪽 복지는 꽤 빠르게 개선될 겁니다. 돈이 얼마 안 들거든요. 저출산 때문에 아동들 수가 계속 줄어들기 때문에 재원 소요가 크지가 않아요. 노인 쪽은 다릅니다. 노인인구 자체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에 복지 수준까지 높이면 지금 재정 규모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요.” 그러고 보니 복지에 소극적이었던 이명박 정부에서도 무상보육은 꾸준히 확대됐다. 반면 기초노령연금 급여율은 5년 동안 0.1%도 오르지 않았다.
결국 관건은 ‘돈’이다. 재원 마련이 힘들기 때문에 노인복지는 가장 시급하면서도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로 꼽혀왔다. 사정이 이러하니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기초노령연금 2배 인상’을 대표 공약으로 내세웠을 때 진보진영마저 깜짝 놀랐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80% 노인에게, 2017년까지 단계적으로 주겠다”고 한 반면, 박 당선인은 “전 어르신에게, 즉시 주겠다”고 약속했다. 새누리당의 4월 총선 공약에는 이 내용이 없었고, 문재인-안철수 단일화 추진 합의가 발표된 날(지난해 11월5일) 대한노인회를 방문한 자리에서 갑자기 꺼내들었다는 사실은 잠시 잊기로 하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법이다.
박 당선인 쪽은 부랴부랴 이 공약을 끼워넣으면서도 ‘준비된 대통령’다운 ‘꼼꼼함’을 잃지 않았는데, 바로 ‘국민연금과 통합운영’이라는 단서를 붙여놓은 것이다. 슬며시 한 것도 아니다. 박 당선인은 대통령 후보 토론에서 분명하게 밝혔다. 단지 이 통합이 ‘어떤’ 통합인지 설명하지 않았고, 문 후보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이 이를 문제 삼거나 눈여겨보지 않았을 뿐이다.
잔치는 끝났고 이제 계산을 할 시간이다. 계산액이 얼마인지, 누가 계산할지를 놓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연금과 통합’은 어떤 시나리오든 만들어낼 수 있는 도깨비방망이다. 관리 주체의 통합에서 재정의 통합까지 갖가지 방안이 가능하고, 계층 간 세대 간 이해관계가 복잡해 논의가 사방으로 튈 수 있다. 당선인 쪽은 모든 노인에게 기초노령연금을 두 배로 주는 대신 국민연금액을 깎고, 재원도 일부 국민연금 보험료로 쓰는 ‘통합’ 방안을 마련하는 모양이다. ‘돈 문제’ 해결을 위한 박 당선인의 비밀병기는 국민연금이었던 셈이다.
이 방안이 국회로 가면 다시 논란이 커질 것이다. 보수와 진보가 맞서고 각 진영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복지에 대한 열정과 지식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질 않을 두 진보 학자, 김연명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와 오건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이 연금체계 개편에 대해서만큼은 정반대 입장을 취할 정도다. 자칫 방향을 잘못 잡으면 그렇지 않아도 이번 대선을 거치며 악화된 세대갈등에 불을 붙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박 당선인은 그리 답답하지 않을지 모른다. 선거는 끝났고 열매(표)는 이미 수확했다. 나름의 방안만 만들어, 공을 국회로 넘기면 된다. 통합 운영한다고 분명히 말했으니 박 당선인은 ‘약속을 지킨’ 것이다. 국회에서 논의가 길어지는 건 국회 책임이다.
그래도 박 당선인이, 같은 공약을 내걸었지만 ‘국민연금 재구조화(‘통합’의 다른 표현)’를 내세워 이를 무산시켰던 이명박 대통령의 전철을 밟을지 모른다는 우려는 기우라고 믿는다. “따지고 또 따져 할 수 있는 공약”만 채택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번 소동을 지켜보며 거듭 확인한 교훈은 시쳇말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알고’, 서양 속담을 따르면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것이다.
안선희 경제부 기자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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