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시민편집인의 눈]
국민 절반 무시하는 ‘승자독식 대통령제’ 대립 부추겨
‘내각책임제’나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 여론 조성해야
국민 절반 무시하는 ‘승자독식 대통령제’ 대립 부추겨
‘내각책임제’나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 여론 조성해야
한국인들은 5년마다 받들어 모실 ‘임금’을 투표로 뽑는다. 임금도 잘못하면 축출되거나 왕조가 망할 수 있는데, 우리 대통령은 임기가 보장되고 악정을 저질러도 단임제이니 책임지지 않는다. 사실 민주주의가 착실히 뿌리내린 나라치고 대통령제를 택한 나라는 많지 않다. 미국의 대통령제는 의회가 강력하게 견제하고 지방분권도 잘돼 있다. 러시아도 대통령과 총리가 권력을 분점한다. 우리나라만큼 대통령 권한이 막강하면서도 책임성이 약한 정치체제는 선진국에서 찾아볼 수 없다.
‘환호작약’과 ‘망연자실’. 대선이 끝나고 국민 감정이 이처럼 극단으로 표출되는 것은 바로 대통령제 자체의 모순 때문이다. 이번에도 표 차이는 3.6%에 불과하지만 가져가는 것은 전부 아니면 전무. 대통령이 직간접으로 인사권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만도 7천~1만개나 된다고 한다. 기관장으로 임명된 사람들이 또 수십만명 물갈이를 해대니 대선이 사생결단의 전쟁이 될 수밖에 없다. 물갈이 규모로 본다면 조선시대 서인이 남인을 몰아낸 ‘경신대출척’이나 남인이 국면을 바꾼 ‘기사환국’도 약과다. 대축출이나 재집권이 5년마다 되풀이되는 것이 지금 정치현실이다.
더 큰 문제는 날로 다원화하는 사회에 대통령제가 부적절한 정치체제라는 점이다. 대통령제는 소수는 물론이고 국민 절반의 목소리마저 무시하는 한계를 안고 있다. 대선은 대통령을 뽑는 절차인 동시에 우리 사회의 온갖 이슈들이 활발하게 토론되는 공론장이다. 그러나 선거의 패자가 주장했던 의제들이 승자에 의해 수렴될 여지는 거의 없다. 지역간, 계층간, 세대간 갈등은 선거과정에서 해소되기보다는 증폭되는 게 상례다. 선거 결과는 보수든 진보든 한번은 희극으로, 한번은 비극으로 다가간다.
대선 이후 <한겨레>를 포함한 언론들이 ‘상생’과 ‘통합’을 말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으랴. 현실은 ‘상극’과 ‘분열’로 치달을 가능성이 크다. <한겨레>는 20일치 사설에서도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이나 세력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국정에 반영해야 한다’고 박근혜 당선인에게 촉구했다. 그러나 ‘좌빨정책’으로 몰아붙인 문재인 후보의 경제·복지·대북정책 등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다. 언론들은 반대표가 많이 나온 호남에서 총리를 발탁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김황식 총리에서 보듯, 구색 맞추기용 이상이 되기는 힘들다. 대통령제에서 총리는 승자독식의 적나라한 모습을 가리는 위장막인 경우가 많다.
승자의 선의에 기대는 상생과 통합은 대개 집권 초기에 시늉으로 끝난다. 여기서 제도적으로 그것을 보장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문재인 후보뿐 아니라 박근혜 후보도 책임총리제와 분권을 약속했으니 제대로 하려면 개헌을 마다할 수는 없으리라. 벌써부터 공약을 다 지킬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기득권층에 맞서 <한겨레>가 개헌을 끈질기게 주창해야 하는 이유다. 진정한 보수라면 우리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함께 제도개혁에 나서야 하지 않을까?
언론이 ‘국민의 선택’이라며 승자의 가치와 정책에 무조건 승복하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번 대선은 고령화 사회의 또다른 문제가 드러난 선거이기도 했다. 노인들의 의사는 존중돼야 하지만 과도하게 반영된 것 또한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기성세대가 전쟁을 결정하면 청년들이 피를 흘려야 했다. 세대투표의 패자인 상대적으로 젊은 층은 승자인 늙은 층의 아들딸이 아닌가? 좌절하는 청년들의 미래를 기성세대가 열어주지 않는다면 그 화는 끝내 모두에게 돌아간다.
분권형 대통령제는 책임총리를 헌법에서 보장한다.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고 총리를 비롯한 각료는 의회에서 뽑는다. 50여개국에서 채택하고 있는데 특히 동유럽국들이 민주화 이후 제일 많이 택한 정치체제라는 점에서 우수성이 입증됐다.
의원내각제는 민주주의 역사가 긴 나라에서 주로 택하고 있는 제도다. 내각제에는 협력적 통치의 정신이 가미돼 있다.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면 연정을 해야 하고, 과반을 확보한 정당일지라도 의회에서 야당을 동반자로 삼지 않으면 통치가 어렵다. 내각제 국가에서는 보수·진보정당의 정책마저 상당히 근접해 있다.
대통령제의 모순은 국민 절반의 지지조차 못 얻은 정권도 전권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내각제라면 36.6% 득표율을 기록한 노태우 정부 대신 김영삼-김대중의 연정이 들어섰을 것이다. 531만표 차이로 이긴 이명박은 선거인 대비 득표율이 고작 30.5%였는데도 5년간 전횡을 일삼았고, 국민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토론을 꺼리는 박근혜 후보는 의원내각제였다면 정권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영국에서는 장관들이 야당의 예비내각과 토론하며 정책경쟁을 하는 모습을 <비비시>(BBC) 중계를 통해 늘 볼 수 있다. 매주 수요일 정오부터 30분간은 아예 ‘피엠큐에스’(PMQs: Prime Minister’s Questions)라 하여 총리가 야당 당수들과 현안을 놓고 격돌한다. 영국인들은 이 토론들을 보면서 현안을 이해하고 정치인들의 능력을 가늠한다. 지지를 잃은 정권은 언제든 교체될 각오를 해야 한다.
단 한 번 양자 토론으로 대통령을 뽑은 우리는 과연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기나 한 건가? 그렇게 뽑힌 대통령이 임명한 총리와 장관들은 국민은 안중에 없고 대통령한테만 충성한다. 구청장도 선거로 뽑는 시대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내각제에서는 요직에 누가 앉을 것인지 알고 투표하니 집권 후 ‘인사가 망사’가 되는 일은 없다. 논리보다 저주가 무기인 윤창중씨 같은 극우논객이 대변인이 될 줄 알았으면 표를 주지 않았을 유권자도 꽤 있을 것이다.
살벌하게 말하는 사람은 지지자를 결속할 수는 있어도 상생의 정치는 불가능하다. 영국의 정치는 치열하게 토론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윈스턴 처칠은 정치적 라이벌인 한 여성이 “내가 당신 아내라면 당신의 커피에 독약을 타겠다”고 하자 위트 있게 대꾸했다. “내가 당신 남편이라면 그 커피를 당장 마셔버릴 거요.”
국민을 즐겁게 하는 정치, 소외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는, 전부 아니면 전무로 귀결되는 대통령제로는 불가능하다. 제도마다 장단점이 있지만 단점이 너무 많아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방치한다면, 우리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진보언론이 수수방관해서는 안 될 중대한 과제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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