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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박근혜 타임, 박정희 타임

등록 2012-12-10 19:30

김종구 논설위원
김종구 논설위원
1970년대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과 <뉴스위크> 등은 한국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외국 언론이었다. 요즘이야 외국에서 생산되는 뉴스와 정보들이 인터넷 등에 감당할 수 없이 넘쳐나지만 그때만 해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다. 옆구리에 타임 잡지를 끼고 다니는 것은 영어깨나 하는 먹물 든 지식인의 표상이기도 했다.

그런데 가끔 <타임>의 기사 일부분이 까맣게 먹칠이 돼서 나오는 때가 있었다. 당시 시퍼렇게 작동하던 사전 검열은 외국 언론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정권에 조금이라도 불리한 기사, ‘나라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기사는 독자들과 철저히 차단했다.

최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표지 인물로 실은 <타임>의 제목 ‘the strongman’s daughter’ 번역을 놓고 한바탕 소동이 일었지만 사실 그것은 논란거리도 되지 않는다. ‘힘을 이용해 통치하는 정치 지도자’라는 사전의 일반적 풀이가 말해주듯 strongman이 ‘독재자’의 에두른 표현임은 상식에 속한다. <타임> 쪽이 점잖게 완곡어법을 구사한 의도까지 고려해 양보해도 ‘철권통치자’ 정도의 의미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것을 ‘권력자’니 ‘강력한 권력자’니 심지어 ‘실력자’로 옮기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다. 멀리 갈 것도 없다. ‘North Korean strongman Kim Jong-il’을 ‘북한의 실력자’ 따위로 번역했다가는 새누리당 사람들이 ‘종북세력’이라고 벌떼처럼 덤볐을 것이다.

사실 새누리당은 더 좋은 번역을 놓쳤다. 그것은 바로 ‘강력한 영도자’다. 실제로 그 당시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그렇게 불렀다. “민족의 강력한 영도자이신…”으로 시작하는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이런 호칭 자체에 당시의 비민주적이고 강압적인 통치 분위기가 잘 깃들어 있으니 그런대로 괜찮은 번역 아닌가.

생각해보면 새누리당의 ‘의도된 오역’을 탓할 바는 못 된다. ‘불리한 영어’를 정확하게 번역할 정도의 바른 심성을 가진 집권 여당이라면 나라가 이런 꼴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사슴을 보고 말이라고 우겨온 것도 한두번이 아니다. 당사 간판만 새누리당으로 바꿔달고 당이 통째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이명박 정부 내내 나라를 다스려온 사람들이 ‘우리가 정권을 잡으면 정치교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재집권, 정권연장, 정권승계 등의 적확한 표현은 어디로 실종해버렸다. 언어에 회칠·분칠을 해서 현실을 거꾸로 비틀어버리는 놀라운 능력이다.

문제는 이런 ‘지록위마’ 전략이 현실에서 먹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새누리당의 능수능란한 프레임 짜기에 놀아나는 야당의 무능함 탓이 크다. 하지만 더 큰 원인은 언론에 있다. 이 땅의 보수신문과 방송사들도 strongman의 올바른 번역이 ‘권력자’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안다. 새누리당이 간판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한나라당이며, 이번 대선이 정권교체 대 정권연장의 대결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런데도 짐짓 모른 척한다. 그리고 ‘누리꾼들 사이에 strongman 번역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며 본질을 흐린다. 이런 언론 환경에서 새누리당은 마음 놓고 사슴을 말이라고 우긴다.

박정희의 ‘타임’과 박근혜의 ‘타임’은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본질이 완전히 동떨어진 것도 아니다. ‘원천 차단’에서 ‘간접 차단’으로 수법이 교묘히 바뀌었을 뿐 진실은 여전히 국민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강압 대신에 등장한 교묘한 통제와 순응이 훨씬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박정희 시대를 뒤이은 박근혜 시대의 위험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리고 ‘strong queen의 등극’은 이런 현상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표지 제목을 둘러싼 논란은 <타임>이 인터넷판 제목을 ‘dictator’s daughter’로 명확히 명기해놓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끝을 맺었다. 오역을 들이밀었던 새누리당과 일부 언론들도 머쓱해졌다. 하지만 지금 새누리당과 수구언론이 합작해서 벌이는 의도된 ‘정치 오역’에는 누가 유권해석을 내릴 것인가. 그것은 결국 12월19일 투표장으로 향하는 유권자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

김종구 논설위원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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