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 경제부장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불꽃이 튀어나오며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니… 가슴은 돌처럼 튼튼하며… 칼이 그에게 꽂혀도 소용이 없고 창이나 투창이나 화살촉도 꽂히지 못하는구나… 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 없는 것으로 지음받았구나.’
구약성서 욥기에 등장하는 ‘리바이어던’은 인간 세상에선 맞설 자가 없는 무적의 존재로 묘사돼 있다. 오직 신의 손길에 의해서만 통제할 수 있는 공포의 괴물이다.
횡령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최태원 에스케이(SK)그룹 회장에 대한 지난달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리바이어던’을 거론하며 최 회장을 강하게 질타해 눈길을 끈 바 있다. “최 회장은 에스케이글로벌 사건에서 이미 조직적 증거인멸을 했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뒤 사면됐다. 이를 통해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수사기관의 수사를 방해하고 증거인멸을 해도 된다는, 법을 안 지켜도 된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이는 법 위에 군림하려는 재벌의 모습, ‘리바이어던’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엄한 꾸짖음에 뒤이어 나온 구형량이 피식, 실소를 금치 못하게 했지만 재벌의 ‘문제적 모습’을 잘 집어냈다는 점만큼은 인정해줘야 할 것 같다.
재벌(chaebol)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한글 용어로 정착돼 있는 데서 엿볼 수 있듯 ‘한국의 경제권력’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피로 맺어진 가족경영에 거대 기업의 권력을 세습하는 전근대적인 모습으로, 일반적인 대기업이나 복합기업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 경력이나 능력과 무관하게 2세, 3세로 기업의 ‘자원’이 나뉘고 그렇게 자원을 물려받은 2세, 3세들이 내수산업 전반에까지 무차별적으로 뛰어들어 국내 경제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드는 문제점은 그 독특한 속성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 그에 따른 부작용이 비등점까지 들끓어 ‘경제민주화’라는 역풍으로 이어졌을 터다.
대선을 2주일가량 앞둔 현재 경제민주화 바람은 애초 기대만 못해 소강 국면에 접어든 모양새다. ‘경제민주화법 1호’라는 별칭을 얻었던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의 통과가 새누리당의 제동에 걸려 무산된 상태인데다 경제민주화의 상징 인물처럼 부각됐던 김종인(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씨의 의지가 열매를 맺지 못한 채 꺾일 처지에 빠져 있는 게 그 뚜렷한 예다. 정치권의 역량 부족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리바이어던’의 힘이 그만큼 막강함을 보여주는 증표로 여겨진다.
경제민주화 바람을 받쳐주는 법적 토대는 헌법 119조 2항이다. 경쟁적인 시장질서를 형성하고 힘의 우위에 선 대기업의 폐해를 막기 위한 정부의 개입 근거인, 이른바 경제민주화 조항이다. 하지만 이 조항은 ‘문어발 가족경영으로 인한 재벌의 폐해를 교정하려는 것이 아니’어서 ‘재벌개혁의 법적 근거는 오히려 특수계급의 인정, 창설을 금지한 헌법 11조 2항’(<어떤 경제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변양균 지음)이라는 지적을 눈여겨볼 만하다. 재벌 그룹 인사에서 2세, 3세라는 이유로 초고속으로 승진해 경영권을 거머쥐는 봉건적 세습이 당연시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헌법적 각성’이라는 점에서다.
욥기에서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그려진 리바이어던이 이사야서에선 신의 칼로 벌을 받고 시편에서는 참혹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한다. 한국 경제의 리바이어던을 길들일 신의 섭리는 결국 대선일에 투표소로 들어가는 유권자의 손끝에서 시작될 터이다. 유권자의 손이 정치를 바꾸고, 그 정치가 우리 사회 게임의 룰을 교정하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이뤄질 수밖에 없는 게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일 것이기 때문이다.
김영배 경제부장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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