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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야구야, 미안하다 / 김양희

등록 2012-11-13 19:18

김양희 스포츠부 기자
김양희 스포츠부 기자
<2012 프로야구가 아시아시리즈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내년 3월 세계야구클래식(WBC)까지 야구는 더 이상 없다. 2012 야구에 작별의 편지를 띄운다.>

녹색의 그라운드가 갈색으로 변하고 있구나. 이제 정말 겨울이 왔나 싶다. 너는 이제 잠시 휴식기에 들어갔다가 얼음이 녹을 무렵 다시 우리 곁을 찾아오겠지. 준비기간 동안 꽃단장을 하고, 더 활기찬 모습으로 말이야. 그리고, 기대감을 갖고 또 한 시즌을 시작하겠지.

너를 처음 만난 게 초등학교 때였나. 과수원 일로 바쁘신 부모님과 변변찮은 놀잇감의 빈자리를 채워준 게 너였어. 경기를 보면서 팔딱팔딱 뛰는 숨을 느끼곤 했지. 스무해 넘은 먼지를 간직한 일기장 한 귀퉁이에 비뚤배뚤 휘갈겨 쓴 글씨에서 너의 흔적을 발견할 때면 ‘그땐 이랬나?’ 하는 마음이 든단다.

고맙다. 올해 700만명 이상이 현장에서 너로 인해 웃었고, 울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빛깔의 700만개 추억을 가슴에 품고 발길을 돌렸을 거야. 경기장이 아니더라도 다른 공간에서 너를 지켜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겠지. 우리 아이들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은 추억을 공유하며 한 움큼 더 자랐단다. 나중에 기억은 사라져도 추억은 남겠지.

10년째 쓰라린 겨울을 보내고 있는 엘지 팬들 때문에 마음이 불편도 하겠구나. “다신 안 볼 거야”라는 절연의 맹세에 애도 끓겠지. 20년 동안 우승하지 못한 롯데 팬도 마찬가지려나. 하지만 그거 아니? ‘그깟 공놀이’라고는 하지만 ‘공놀이 이상’이 되어버린 게 너라는 거. 머릿속 계산 없이 온전한 감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게 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니. 그래서 기꺼이 8만원(잠실구장 탁자석 개별 가격)의 거금도 너를 위해 치를 수 있던 것이겠지.

미안하다. 너를 만명밖에 수용 안 되는 조그맣고 낡은 그곳에 가둬서. 비가 오면 물이 새는 더그아웃에 떠민 것도, 울퉁불퉁 잔디가 팬 곳에서 경기하게 한 것도. 선수들의 부상에 그동안 죄책감을 많이 느꼈겠지. 그리고 시즌 내내 홈에서 응원했던 팬이 아닌 제3지역(잠실)의 팬들 앞에서 2012 시즌 마지막을 고하게 한 것도 미안하구나. 수용 인원 2만석 이상의 구장들이 많이 지어지면 상황이 조금 나아지려나. 한창 공사중인 광주구장, 공사 계획중인 대구구장, 보수 대기중인 수원구장 등이 새 단장을 할 때까지 기다려보자꾸나. 구단주들이 정작 찾아야 할 곳은 홈구장인데 왜 잠실구장에만 가는지 모르겠다.

더 큰 미안함은 너로 인한 수익이 너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거란다. 서울시는 너로 인해 가치가 올라간 잠실야구장의 수익을 야구장보다 다른 곳에 더 많이 쓰고 있으니까. 임대료·광고료로 한해 97억여원을 벌면서 잠실야구장 시설 개선에는 겨우 20억원만 쓴다니 불편한 편의시설을 이용하는 팬들만 희생되는구나. 항간에는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이 케이팝(K-POP) 전용구장 후보지로 불리더구나. 잠실 올림픽경기장은 야구 돔구장 후보였는데…. 그래도 힘을 내렴. 수원시나 전라북도처럼 너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곳도 있으니까. 기존 구단들이 배짱을 퉁기고 있지만 제10구단 창단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겠지.

누군가 그러더구나. 야구는 청춘이라고. 우리가 너를 등질 수 없는 이유는, 지금은 절대 되돌아갈 수 없는 청춘의 추억 때문이겠지. 내년에도 700만개, 아니 800만개의 추억을 만들어주길 부탁할게. 그게 네가 제일 잘하는 일이고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일 테니까.

P.S. 그나저나 우리 남편 좀 말려줄 수는 없겠니? 아무리 너를 좋아해도 그렇지, 하루 3번 사회인 야구는 너무하잖니~.

김양희 스포츠부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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