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 첫해에 기자는 청와대를 출입했다. 기자가 겪은 ‘노무현 청와대’는 그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하루종일 엄청난 분량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대통령은 기자회견도 며칠에 한번꼴로 자청하고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벌였다. 대통령 스스로 토론 공화국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각 언론사는 종전 한명씩이던 청와대 출입기자를 1진, 2진 개념을 두어 2명으로 늘렸다. 말이 많은 대통령의 ‘발언 물량’을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노 대통령은 말이 많다는 이유로 공격을 좀 받았다. 한쪽에선 막말을 한다고 비난했고, 다른 한쪽에선 국정 현안에 대해 너무 구체적으로,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은 대통령답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 결과 노 대통령은 당시 정치적으로 약간 손해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국정에 대한 알권리를 한껏 누렸다. 노 대통령은 중요 현안에 대해 직접 명료하게 말함으로써 언어 민주화를 실천했고 우리 사회에 탈권위주의를 확산시켰다. 아울러 맛깔스러운 표현을 고안해 말의 향연을 펼쳐 보임으로써 정치를 관전하는 재미를 흠뻑 더해 주었다.
엊그제 문재인 민주통합당,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가 단독으로 만나 단일화 논의 국면을 열었다. 두 사람은 자신이 단일후보로 선택받고자 앞으로 한동안 더욱 치열하게 경쟁할 것이다. 단일화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국민을 감동시키고 지지의 폭을 더욱 넓히는 단일화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언어다. 정치가 본래 대중 앞에서 언어를 도구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특히 단기간의 경쟁일수록 언어 구사의 효과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안철수 후보는 말에 관한 한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다. 추상적인 개념어를 쓰지 않고 알기 쉬운 말을 잘 골라 쓰는 특징이 있다. 비유를 찾아내는 순발력도 기막히다. 청춘 콘서트를 비롯해 강연을 많이 한 것도 말을 다듬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안 후보가 가끔 중요한 문제에 대해 모호한 화법을 쓰는 것은 좀 거슬린다. 가령 안 후보는 정당 개혁을 주장하다가도 구체적인 방법을 질문받으면, “국민들한테 찾아가서 물어보라”고 말하곤 했다. 기왕에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 논거와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게 옳다. 그래야 상대방과 생산적으로 토론하기 쉽고 관전하는 국민들이 이해하기도 쉽다. 더욱이 지금은 단일화 국면인 만큼 정당개혁 방안, 무소속의 취약점을 보강할 방법, 양쪽 지지층을 모아낼 국민연대의 방안 등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의견 표명이 더욱 필요한 때다. 선문답 화법은 오해를 빚기도 쉽다.
문재인 후보는 민주당 후보 경선 이래 지금까지 대체로 통합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당 안, 당 밖을 가릴 것 없이 경쟁자를 공격하는 말을 삼가는 편이다. 문 후보가 자신의 지지율을 나름대로 끌어올린 것도 이런 행보의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문 후보의 말은 기본적으로 심심하다. 풍부한 국정경험이 후보 자질 측면에선 장점이겠지만, ‘공무원 언어’로 선거 캠페인을 이끌 수 없음도 분명하다. 절박한 시점에 지지율이 추가로 오르지 않는 데는 이런 까닭이 있다. 유권자들의 눈길을 확 잡아끌 “한 방이 없다”는 것은 후보로서 작은 흠이 아니다.
국민들은 노 대통령을 지금도 사랑스러운 대통령으로 기억하고 있다. 말의 힘은 그만큼 큰 것이다. 안철수 후보는 좀더 명료하게 말해주면 좋겠다. 문재인 후보는 말의 빛깔과 매력 문제를 고민하기 바란다. 국민한테 함께 공감하고 소통하는 즐거움을 줄 때, 단일화의 폭발력도 커질 것이다.
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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