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시민편집인의 눈]
대를 이은 미국 대통령은 왜 실패했나…‘후광효과’ 제동을
유신은 역사가 아닌 취재 거리…‘이미지 선거’ 돕지 말아야
대를 이은 미국 대통령은 왜 실패했나…‘후광효과’ 제동을
유신은 역사가 아닌 취재 거리…‘이미지 선거’ 돕지 말아야
미국에서 애덤스, 해리슨, 부시, 세 가문은 직계로 대통령을 둘씩 배출했다. 애덤스와 부시 가문에서는 부자 대통령이 탄생하고, 해리슨 가문에서는 손자가 또 대통령이 된다. 공통점은 가문의 두 번째 대통령이 선대에 훨씬 못 미쳐 ‘실패한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해리슨 가문은 미국 대통령 선거를 타락시킨 것으로도 정치사에 남았다. 9대 대통령 윌리엄 해리슨은 선거를 정책이 아닌 쇼와 흑색선전의 대결장으로 만들고 당선된 첫 대통령으로 평가된다. 그는 테쿰세가 이끄는 인디언 동맹을 잔인하게 토벌하고 정치적 기반을 닦았다. 인디언한테 경기도만한 땅을 강탈해 치부하고도 통나무집에 사는 서민으로 포장하고 선거를 치렀다. 처음 로고송을 도입해 전국을 누비는가 하면 폭로와 비방으로 이미지 선거전을 폈다. 그러나 취임식장에서 추운 날씨에 외투까지 벗고 100분 가까이 연설하다가 폐렴에 걸려 한 달 만에 죽었다.
대통령 할아버지와 상원의원 아버지의 후광으로 대통령 후보가 된 벤저민 해리슨 역시 흑색선전으로 영국계와 아일랜드계 유권자를 이간질하고 상대 후보를 매도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그도 잇단 정책 실패로 지지자들마저 실망시키고 말았다. 흑색선전과 이미지 선거에 결정적 구실을 한 것은 진실보도를 외면하고 이미지 만들기에 앞장선 미국 언론이었다.
2012년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통령 선거에도 시대와 나라가 다를 뿐 놀랄 만한 유사성이 발견된다. 대통령의 딸이 유력 후보로 등장했을 뿐 아니라 흑색선전과 이미지 선거 양상도 흡사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강탈한 재산으로 정수장학회와 영남대재단을 만들었으면서도 ‘청렴한 이미지’로 남았는데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것 또한 윌리엄 해리슨을 닮았다. 권력의 ‘세습’을 돕기 위해 유수 언론이 후보의 이미지 만들기에 적극적인 것도 기시감이 있다.
선대 대통령의 공과가 뚜렷하면 그 공적이나 과오 자체가 선거 이슈로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 후광효과를 최대한 누리면서 과오에 대해서는 얼버무리려 든다. 그 대신 말꼬리 잡기와 흑색선전으로 국면을 전환하려 한다. 북방한계선(NLL) 논란이 대표적이다.
이때 정론지의 역할은 역시 진실 추구다. 북방한계선을 둘러싼 논란에서 중요한 진실은 녹취록의 유무가 아니라 북방한계선의 성격이다. 그 성격 규정에 따라 남북관계가 더 경색될 수도 있고 해빙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은 노무현-김정일 회담 당시 ‘비밀 녹취록’이 있었다며, 특히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문재인 후보에게 이념공세를 폈다. 그들은 대통령 후보들에게 월북을 막기 위한 북방한계선이 영토선임을 인정하라고 윽박지르고 있지만, 그거야말로 진실과 거리가 먼 흑색선전이다. 새누리당의 뿌리인 김영삼 정부는 물론이고, 그 선을 그은 미국 정부조차 영토선이 아닐뿐더러 국제법에 반하는 것이고 ‘북방한계선 사수’는 한-미 상호방위조약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한겨레>는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이 만든 프레임에 말려들어 녹취록이 없다는 주장을 전달하는 데 치중하면서, 일부 진보매체에 견주어 북방한계선의 성격을 이슈화하는 데는 소홀했다는 느낌이 든다. 11일치 사설에서도 녹취록의 존재를 부인하는 데 중점을 두고, ‘국회 해당 위원회가 자료를 요청해 비공개로 보면 될 것’이라 했는데, 남북관계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주장이었는지 의문이다. <한겨레>는 지난 2007년 ‘북방한계선이 영해선이라고 한다면 위헌적 주장’이라는 서주석 전 청와대 안보수석의 기고문(8월28일치)을 실어 보수언론과 대립각을 세운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런 ‘전의’가 안 보인다.
북방한계선을 영토선으로 보는 것은 국익에도 손해나는 일이다. 지금 서해 북방한계선 근해에서 남북 대치 국면을 틈타 ‘어부지리’를 챙기는 이는 중국 어부들이다. 1980년 백령도 레이더기지에서 해군장교로 복무할 때 어선 통제 업무도 맡았는데 어민들에게 들은 푸념이 “남북이 함께 조업하는 날이 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이었다. 북방한계선 근해는 특히 고기가 많았는데, 남북의 병사들에게는 접적해역이지만 고기들에게는 안전지대였던 셈이다. 어민들의 오랜 소망이 노무현-김정일 회담 때 남북공동어로수역으로 성취되는 듯했지만 헛된 꿈이 되고 말았다.
일본과도 독도 근해를 공동어로수역으로 설정해놓은 터에 같은 민족끼리 그것 하나 합의보지 못하고 있다. 사실 영토선조차도 국가 간에 중요한 것이지 언젠가 통일될 민족 내부에서 영토선을 다투는 건 긴 역사적 안목으로 보면 별 의미가 없다. 삼국시대에 국경이 어디였는지 지금 와서 뭐 그리 중요한가?
유신시대 재조명과 관련해서는 <한겨레>가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문화방송(MBC) 간부들의 비밀회동과 대화록을 특종보도(13, 15일) 함으로써 장학회와 박근혜 후보가 어떤 유착관계인지를 파헤치는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유신시대의 시작(10.17)과 끝(10.26)이 모두 들어 있는 10월에 유신시대의 참혹한 정치사회상을 취재해 내보내는 연재물 하나 없었던 것은 아쉬웠다.
<한겨레>는 한홍구·안병욱·강만길 교수 등 주로 역사학자들이 쓴 연재물을 내보내긴 했다. 그러나 유신은 박근혜 후보의 말처럼 역사에 맡길 게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란 점에서 집중조명이 필요하고, 기자들이 직접 나설 사안이었다고 본다. 당시 끔찍한 고초를 겪고도 가슴속으로만 끙끙 앓아야 했던 사람이 한둘인가? 그들이 살아있을 때 언론이 증언을 들어두어야 역사학자들이 ‘사초’로 활용할 게 아닌가?
노동자나 대학생으로서 유신을 뼈저리게 체험한 세대는 지금 50대 중반 이후이다. ‘유신의 퍼스트레이디’가 대통령 자리를 넘보는 오늘의 사태는 시간의 흐름 속에 고통을 기억하는 이가 적어진 탓이 크다. <한겨레>는 유신시대의 진실 규명보다 박근혜 후보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데 목소리를 보탰는데 그렇게 해서 얻어낸 결과가 무엇인가? 그의 신념이 바뀌었을까?
‘민족중흥의 지도자였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명에 보낸 고아, 결혼도 하지 않고 가정을 지켜온 처녀 가장, 그러고도 웃음을 잃지 않는 고상함, 이명박 정권의 박해 속에서도 여당을 지켜낸 ‘선거의 여왕’, 거기에 아버지의 과오를 반성하기까지!’ 어떤 인생도 뺄 거 빼고 묘사하면 감동의 드라마가 된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보수언론의 이미지 만들기와 진보언론의 직무태만이 만들어낸 합작품일 것이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 이 칼럼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언론진흥기금이 지원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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