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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박근혜의 사과, 언어의 가면 / 박창식

등록 2012-09-27 19:34수정 2012-09-27 21:10

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엊그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박정희 정권의 잘못을 사과한다고 사용한 표현이 영 걸린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우국충정과 진정성을 한참 강조한 다음에,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남들이 알아서 이것을 사과라고 받아주니까 사과가 된 것이지, 무슨 말인지 알아먹기가 힘들다. 에둘러 논점을 피하는, 교묘한 완곡어법을 썼기 때문이다.

박 후보의 사과 발언은 첫째, 행위 주체를 고의적으로(?) 빼먹었다. 5·16이나 유신,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추종자들이 저질렀다. 그런데도 사람이 아닌 사건을 주어로 삼아 가해자를 은근히 흐리고 있다. 둘째, 헌법 가치를 훼손했다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를 무너뜨렸다거나 인권을 짓밟았다고 하는 것과 비교해 ‘헌법 가치 훼손’은 표상하는 담론이 훨씬 거대하다. 큰 게 반드시 좋은 게 아니라 그럼으로써 언어의 구체성이 약해지고 비난 가능성과 혐오감을 줄여준다.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켰다는 표현도 그렇다. 5·16이나 유신은 역사를 송두리째 후퇴시켰다고 보는 게 옳다. 그런데도 ‘정치발전 지연’으로 해악의 범위를 축소시켰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정치불신이 심하다. 그래서 정치발전쯤은 지연시키더라도 큰 죄로 여길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박 후보가 그런 측면까지 고려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완곡어법이 매우 특별한 언어효과를 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완곡어법은 정치언어에서 이따금 쓰인다. 가령 미국 국방부는 ‘민간인이 사살되었다’고 발표할 뿐, ‘미군이 그들을 살해했다’고는 표현하지 않는다. 민간인 사망은 보통 ‘부수적 피해’라고 표현한다. 강제수용소는 ‘화해를 위한 시설’, 그라나다를 침공한 육해공군은 ‘카리브해 평화유지군’, 침략은 ‘급습’으로 완곡하게 표현을 바꾸곤 한다. 완곡어법은 불쾌한 느낌을 감추기 위해 덜 부정적인 뜻을 내포한 단어로, 언어의 가면을 씌우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 고르기아스는 “말은 무척 강력한 폭군이다…진실이 아닌 말도 교묘하게 재주껏 쓰이면 똑같은 효과를 낳는다”고 했다.

모호한 화법은 의문을 낳기 마련이다. 박 후보가 이렇게 말할 거라면 불과 얼마 전까지는 왜 “5·16은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옹호했는지, 그 옹호 발언을 지금은 취소하겠다는 건지, ‘아버지 복권이 박근혜가 정치를 하는 이유’라고 한 측근 김재원 의원의 말과 이번 사과 발언은 어떤 관계인지. 심지어 얼마 전 인혁당 사건을 놓고 “두 개의 판결이 있다”고 한 것처럼, 혹시 뒷날 집권할 경우에 “두 개의 역사인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지…. 그의 에두른 표현이 한편으로 지지율이 떨어져 고민스럽지만 기왕의 태도를 송두리째 바꾸기도 싫다는 복잡한 생각의 결과물이 아닌지. 궁금증이 이렇듯 뭉게뭉게 피어오르는데도, 박 후보가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않고 회견장을 빠져나간 것은 책임 있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의 현대사 발언은 종전에 비해 진일보했다. 하지만 국가 지도자의 언어로는 부족하다. 정치인이 국정 현안을 표현할 때는 완곡어법보다는 직설법을, 비유나 풍자보다는 구체적인 사실과 의지를, 피동형 문장보다는 능동형 문장을 쓰는 게 옳다. 당장 엊그제 그것을 “박정희 대통령은 5·16, 유신 등 불법적인 쿠데타를 저질렀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후퇴시켰습니다. 저는 이 점을 인정하고 그동안의 태도를 고치겠습니다”로 바꿔 말하면 어떤가? 진정성 시비나 의문이 확 줄지 않겠는가?

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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