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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과거사’라는 언어의 덫 / 박창식

등록 2012-09-06 19:18

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언어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만이 아니다. 언어는 그 자체로 실재를 창조한다. 즉 언어는 특정한 양상을 가진 세상에 대한 틀이다. 언어의 중요성은 정치에서 특히 더 크다. 정치인이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대중의 의식을 많은 부분 바꿔놓을 수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는 언어 구사 ‘기술’을 잘 갖춘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매우 짧은 문장의 간명한 화법으로 청중의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박 후보가 지난 몇해 동안 “대전은요?” “나도 속았고 국민도 속았다” 등의 ‘어록’을 꽤 남긴 것도 이런 방법으로다. 외마디 전달법은 민주적인 의사소통 방법은 아니다. 지도자라면 중요한 공적 질문을 받았을 때 충분히 상세하게 응답할 책임이 있는데, 그 책임을 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잡음을 제거하고 말하는 사람이 의도하는 바만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외마디 전달법은 나름대로 효율적이다.

박 후보는 요즘 선과 악 이항대립 문법을 자주 사용한다. 이분법은 신화에서 익숙하게 채택되는 문법이다. 알기 쉽고 전달력이 높다. 박 후보는 특히 5·16 쿠데타와 유신에 대해 질문받을 때 “과거로 자꾸 가려고 하면 한이 없다. 이제 미래로 가자”며 말을 자른다. 이와 관련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과거에 집착하는 부류로 묶어두고, 자신은 미래지향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려는 논법이다.

그의 언어 구사는 박정희를 빼닮았다. 박정희는 ‘민족중흥’ ‘자립경제’ ‘자주국방’ 등의 정치언어를 내세워 국민들에게 행동지침을 내리고 일사불란한 동원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저항하는 사람들을 서슴없이 ‘반민족’ ‘반국가’로 규정했다. 이항대립 문법은 종종 언어폭력에 동원된다. 선과 악 말고 어떤 다른 절충점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태의 진실을 밝히려는 합리적인 노력도 봉쇄되는 경우가 많다. 박정희의 논리는 그 자체로 모순에 가득 찬 것이었다. 그럼에도 많은 대중한테 수용되었다. 박정희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언어를 독점할 필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오늘날 박근혜 후보의 ‘과거 대 미래’ 문법도 당연히 옳지 않다. 공직 후보자가 5·16과 유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지녔는지를 묻는 것은 과거의 역사 유산 들추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그 사람이 민주주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검증하기 위함이다. 박 후보가 박정희의 전례 그대로 이항대립 문법을 구사해 논점을 피해가고 상당한 대중설득 효과마저 누리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파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과거사’라는 잘못된 언어부터 버려야 한다. 5·16 쿠데타와 유신을 논의할 때 과거사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 중요한 현대사의 문제를 과거의 울타리에 가둬두려는 세력의 의도에 장단을 맞춰주는 행위다. 노무현 정부 시절 권력남용과 인권유린 실태 등을 밝혀내기 위해 만든 국가기구에 ‘과거사진실위원회’ ‘과거사정리위원회’ 등의 이름을 붙인 것도 잘못이었다. 과거사가 아니라 현대사 진실 규명으로 부르는 게 옳았다. 지금부터라도 5·16과 유신은 과거사가 아니라 현대사의 핵심 문제로 표현해야 마땅하다. 이 시대 민주주의 문제를 제대로 토론하기 위해 필요한 첫걸음이 이것이다.

민주파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어떻게 시민과 의사소통할 것인지를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들의 언어는 여전히 복잡하고 자기중심적이다. 미국에선 조지 레이코프라는 언어학자가 진보적 비당파 연구기관으로 로크리지 연구소를 세워 의사소통과 정치언어를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우리도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

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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