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 경제부장
‘경제민주화의 상징’처럼 떠올라 있는 김종인 박사(새누리당 국민행복특별위원장)를 며칠 전 동료기자들과 같이 만난 것은 내게 여러모로 유익했다. 그가 대통령 후보 박근혜의 ‘멘토’라는 점도 있지만, 경제민주화 관련 헌법 조항(제119조 2항)의 입안자로서 들려주는 경제민주화 얘기는 귀를 쫑긋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를 처음 대면한 게 ‘경제부총리 영입설’에 휩싸여 있던 노무현 정부 정권인수위원회 시절인 2003년 초였으니 근 10년 만의 재회였던 셈인데, 예전 그대로라는 인상을 줄 정도로 건강한 혈색이었다. 대통령 당선자인 노무현에 대한 품평에서 거침없었던 예전 모습처럼, 박근혜 후보에 대한 발언에서도 그는 거리낌이 없었다.
경제민주화 얘기 도중 그는 자신의 친할아버지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었던 가인 김병로 선생과 토지개혁을 잠깐 화제로 떠올렸다. 8·15 해방 직후 피폐한 한국의 상황에서 농민들에게 경작지를 분배하는 ‘토지개혁’이 절박했던 것처럼, 시장만능주의의 폐해로 양극화된 지금의 한국 사회에선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가 공동체의 붕괴를 막기 위해 절실하다는 취지였다.
해방 직후 가인은 좌우합작위원회에서 간부로 일했고 이 합작위에선 ‘합작 7원칙’을 발표하게 되는데,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매상(遞減買上·지주의 소작지 면적에 따라 할인율을 달리 적용해 사들이는 방식)을 통해 확보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할 것’을 제의하는 토지개혁 방안도 들어 있었다. 이런 방안에는 가인도 물론 흔쾌히 동의했으며, 이는 그가 당시 몸담았던 보수 우익 ‘한민당’과 결별하는 계기였다고 <가인 김병로 평전>(김학준 저)은 전하고 있다. “토지에 대한 김병로의 인식은 철저했다. (일제시대 때) 각종 소작쟁의 사건의 변호인으로서 소작제도의 실상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믿는 그의 눈에는 소작제도야말로 소작인에 대한 수탈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주들의 토지 취득 과정 또한 대부분 수탈의 축적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그는 보았다.”
토지개혁 논의가 이뤄지던 당시 한국의 실정을 전해주는 자료를 보면, 남북을 통틀어 농지 490만 정보(1정보=3000평, 약 9917.4㎡)의 60%인 295만 정보를 농가의 3%도 못 되는 지주가 독점하고 있었고, 더구나 이들은 연 30% 이상의 가혹한 소작료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상위 몇몇 재벌이 나라의 부를 독점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 실상과 겹쳐 읽히는 대목이다.
김종인 위원장은 가인 선생과 혈육으로 얽혀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깊이 관련돼 있었다. 1963년 가인이 민정당(民政黨, 전두환 주도로 1981년에 만들어진 民正黨과는 전혀 다른) 대표최고위원과 ‘국민의 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야당 통합을 이끌 때 옆에서 보좌했던 게 그였다. 경제학 박사로선 드물게 정치감각 또한 예민하다는 느낌을 주는 게 그런 배경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 경제민주화 흐름 속에서 새누리당 내 김종인 위원장의 처지는, 해방 직후 토지개혁 논의 와중의 한민당 내 가인의 처지와 비슷해 보인다. 보수 우익 새누리당의 주류에게 경제민주화 이슈는 마뜩잖게 여겨지고 있다는 점에서다. 해방 직후 이뤄진 한국의 토지개혁은 비록 철저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지만, 사회 붕괴를 막고 경제의 역동성을 어느 정도 살려나가는 데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인의 지론이 한민당의 당론을 바꾸지는 못했어도 토지개혁에 일정한 기여를 했음직한데, 그의 손자 김종인 위원장의 경제민주화 소신은 얼마나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궁금하다.
김영배 경제부장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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