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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참배 정치’로 국민대통합이 이뤄질 수 있다면

등록 2012-08-22 19:27

김종구 논설위원
김종구 논설위원
“참 나쁜 대통령.” 지난 2007년 초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을 제안한 것에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날린 이 짤막한 논평은 참으로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이 말은 단순히 개헌 추진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었다. 박 후보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총체적 평가가 이 짧은 한마디에 응축돼 있다.

노무현과 박근혜. 두 사람은 얼음과 숯처럼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사이였다. 그것은 단순히 대통령과 야당 지도자의 불가피한 충돌 차원을 넘어선다. 박근혜 후보에게 ‘좋은 대통령’의 표상은 다름 아닌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은 완전히 그 대척점에 서 있다. 철학과 이념, 개인적 기질, 국정 운영 스타일 등 모든 면에서 정반대다. 박 후보에게 노 전 대통령은 필연적으로 ‘나쁜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학법 개정, 국가보안법 폐지 등 두 사람이 격렬히 부딪친 싸움이 많았지만 그 절정은 ‘국가 정체성’ 논쟁이었다. 그 논쟁의 중심에는 역시 박 전 대통령이 있다. 박 전 대통령을 조사 대상에 포함시킨 친일반민족행위 특별법 개정, 의문사진상규명위 활동 강화, 비전향 장기수의 민주화운동 인정 등 박 후보가 “대한민국 정체성의 위기”라고 규정한 것들은 모두 박 전 대통령과 관련돼 있다. 특히 “판사 한번 해보려고 유신헌법으로 고시공부 한 것이 부끄럽다면 부끄러운 고백”이라는 노 전 대통령의 말은 박 후보의 가슴에 비수로 꽂혔을 것이다. 박 후보의 국가 정체성 수호 투쟁은 사실은 ‘아버지 지키기 투쟁’이기도 했다.

박 후보가 후보 당선 뒤 첫 행보를 노 전 대통령 묘소 참배로 시작한 것은 이번 대선을 ‘노무현 대 박정희’ 식의 대립구도로 치르지 않겠다는 뜻일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친노의 부활’을 적극적으로 부각시켜 유권자들의 견제심리를 자극한 것에 비하면 큰 전술적 변화다. 여기에는 대선 가도에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한 안철수 교수를 의식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증오의 정치’ 극복과 안 교수의 역할을 연결짓는 이야기 등이 나오는 상황에서 마냥 손 놓고 있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박 후보의 노 전 대통령 묘소 참배는 그것 자체로는 탓할 게 못 된다. 비록 3년 동안 묘소를 찾지 않았다고 해도 지금이라도 간 것은 잘했다. 다만 이것을 놓고 ‘국민대통합의 적극적 실천’이니 ‘광폭행보’니 하며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다. 유력 정치인이 과거 정적의 묘소 한번 참배했다고 국민통합이 저절로 이뤄질 만큼 세상사가 단순하지도 않다.

흥미로운 것은 박 후보가 노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면서도 정작 고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점이다. 고인을 회고하며 ‘정치적 대결은 했지만 인간적으로 싫어하지는 않았다’는 따위의 덕담 하나쯤 할 법도 한데 일절 없었다. 부인 권양숙씨를 만나서도 “노 대통령께서 친환경 농사를 지은 것으로 안다”고 말한 것이 고인을 추모한 말의 전부다. 말이 없음은 뜻이 없음을 의미한다.

화해와 통합은 상대방에 대한 인정에서부터 출발한다. 상대방의 고뇌와 문제의식을 이해하고 껴안으려는 노력이 없이 화해를 말하는 것은 부질없다. 유감스럽게도 지금 박 후보에게는 그런 노력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과거사 평가를 비롯해 노 전 대통령과의 불화 원인이 된 핵심적 사안에 대한 생각 역시 바뀐 게 없다. 그러니 박 후보에게 노 전 대통령은 ‘그런대로 괜찮은 면도 있었던 대통령’이 아니라 여전히 ‘참 나쁜 대통령’으로 남아 있는 것만 같다.

박 후보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대목이 없지는 않다. 노 전 대통령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것에 대해 박 후보가 마음 아파하는 것은 분명히 사실일 것이다. 서거 당시 서울역사박물관 분향소를 찾아 “충격적이고 비통하다”고 말한 것도 진심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박 후보는 평범한 보통사람이 아니라 국정 최고지도자를 꿈꾸는 유력한 대선 주자다. 권력의 뜻만을 좇아 날뛰는 검찰 개혁을 비롯해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비극의 원천을 찾아 해결하려는 치열한 고민이 없는 단순한 애도는 허무하기만 하다. 그것이 ‘참배 정치’의 한계이기도 하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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