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준 국제부 기자
#킬링(죽임)
“외과의사가 수술실에서 환자를 절개하고 소독하고 잘라내면 상처는 피를 흘린다. 우리는 그에게 손에 피를 묻혔다고 하는가, 아니면 환자를 살린다고 하는가?” 시리아의 바샤르 아사드(47) 대통령이 지난달 의회 연설에서 한 말이다. 지난 16개월 사이 1만7000여명이 숨진 시리아의 반독재 시위와 정부군의 무자비한 학살극을 외과수술에 빗대었다. 누가 어떤 맥락에서 말하느냐에 따라 상식은 궤변이 된다. 아사드는 실제로 의사 출신이다. 다마스쿠스 의대(1982~1988년)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안과 전문의 과정을 수련했다. 그의 아버지이자 전임 대통령은 1971년 쿠데타로 집권한 하페즈다. 3남1녀의 차남인 아사드는 조용한 성격으로, 애초 정치와 군사 따위에 별 관심이 없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1994년 형 바셀이 교통사고로 숨지면서 아사드의 운명도 바뀌었다. 하페즈는 당시 영국 유학 중이던 차남을 후계자로 불러들여 군과 보안기구에서 정치 수업을 시켰다. 30년 독재자였던 하페즈가 2000년 심장마비로 죽자, 아사드는 그해 대선에서 97.2%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올랐다. 한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을 의학도가 어쩌다 지금은 유서 깊은 나라를 킬링필드로 만들고 있을까. #힐링(치유)
“고문은 한 사람의 영혼에 죽음을 각인시키는 행위다. … 힐러리는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나는 ‘고문 생존자가 다시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온 사회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강용주, <프레시안> 인터뷰) 의사 강용주(50)는 그 자신 모진 고문의 피해자다. 전남대 의대 재학 때인 1985년 이른바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잡혀가 온갖 혹독하고 야만적인 고문 끝에 허위자백을 하고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앞서 1980년 5월 그는 대학입시를 앞둔 고3이었다. 광주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던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해 책 대신 총을 들었다.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최후의 살육을 위해 전남도청에 들이닥쳤을 때, 그는 “너무 무서워 총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 뒤론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에 짓눌렸다. 앞날이 보장된 의대생 신분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조작 간첩사건에 휘말렸다. 학살과 탈출, 고문과 회유는 엄청난 트라우마를 남겼다. 지금도 이 얘기가 나오면 그는 눈물을 흘린다. 1999년 비전향 장기수로 출소해 늦깎이로 복학한 그는 2004년 가정의학 전문의 자격을 따자마자 고문생존자 치유 모임을 꾸렸다. 인권운동가 송소연,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조용환 변호사 등이 함께한 이 모임은 2010년 ‘진실의 힘’(이사장 명진 스님)으로 확대돼, 끔찍한 고통의 세월을 견뎌온 이들과 고마움을 나누고 깊은 상처에 새살을 보탠다. 나아가 오는 9월 개소 예정인 광주트라우마센터의 첫 센터장까지 떠맡아 준비작업에 힘을 쏟고 있다. ‘제록스’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총명했던 의대생을 평탄치 않은 길로 이끈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 요즘 힐링이 대세다. 힐링뮤직, 힐링캠프, 힐링카페, 힐링투어…. 이윤 창출에 동물적 감각을 지닌 자본주의의 첨병들은 ‘힐링 마케팅’이라는 섬세하고 유혹적인 키워드로 고객님들의 메마른 소비 감성을 적신다. 우리 사회의 상처가 그만큼 깊고 넓으며, 치유의 욕구가 크다는 방증일 터이다. 아사드와 강용주는 똑같은 의사로 출발해, 한쪽은 죽임의 길, 다른 한쪽은 치유의 길을 걷고 있다. 맨 처음부터 하늘이 정한 운명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삶의 방향을 가를 선택의 갈림길은 한번쯤 누구에게나 온다. 조일준 국제부 기자 iljun@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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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가 수술실에서 환자를 절개하고 소독하고 잘라내면 상처는 피를 흘린다. 우리는 그에게 손에 피를 묻혔다고 하는가, 아니면 환자를 살린다고 하는가?” 시리아의 바샤르 아사드(47) 대통령이 지난달 의회 연설에서 한 말이다. 지난 16개월 사이 1만7000여명이 숨진 시리아의 반독재 시위와 정부군의 무자비한 학살극을 외과수술에 빗대었다. 누가 어떤 맥락에서 말하느냐에 따라 상식은 궤변이 된다. 아사드는 실제로 의사 출신이다. 다마스쿠스 의대(1982~1988년)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안과 전문의 과정을 수련했다. 그의 아버지이자 전임 대통령은 1971년 쿠데타로 집권한 하페즈다. 3남1녀의 차남인 아사드는 조용한 성격으로, 애초 정치와 군사 따위에 별 관심이 없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1994년 형 바셀이 교통사고로 숨지면서 아사드의 운명도 바뀌었다. 하페즈는 당시 영국 유학 중이던 차남을 후계자로 불러들여 군과 보안기구에서 정치 수업을 시켰다. 30년 독재자였던 하페즈가 2000년 심장마비로 죽자, 아사드는 그해 대선에서 97.2%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올랐다. 한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을 의학도가 어쩌다 지금은 유서 깊은 나라를 킬링필드로 만들고 있을까. #힐링(치유)
“고문은 한 사람의 영혼에 죽음을 각인시키는 행위다. … 힐러리는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나는 ‘고문 생존자가 다시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온 사회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강용주, <프레시안> 인터뷰) 의사 강용주(50)는 그 자신 모진 고문의 피해자다. 전남대 의대 재학 때인 1985년 이른바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잡혀가 온갖 혹독하고 야만적인 고문 끝에 허위자백을 하고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앞서 1980년 5월 그는 대학입시를 앞둔 고3이었다. 광주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던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해 책 대신 총을 들었다.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최후의 살육을 위해 전남도청에 들이닥쳤을 때, 그는 “너무 무서워 총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 뒤론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에 짓눌렸다. 앞날이 보장된 의대생 신분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조작 간첩사건에 휘말렸다. 학살과 탈출, 고문과 회유는 엄청난 트라우마를 남겼다. 지금도 이 얘기가 나오면 그는 눈물을 흘린다. 1999년 비전향 장기수로 출소해 늦깎이로 복학한 그는 2004년 가정의학 전문의 자격을 따자마자 고문생존자 치유 모임을 꾸렸다. 인권운동가 송소연,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조용환 변호사 등이 함께한 이 모임은 2010년 ‘진실의 힘’(이사장 명진 스님)으로 확대돼, 끔찍한 고통의 세월을 견뎌온 이들과 고마움을 나누고 깊은 상처에 새살을 보탠다. 나아가 오는 9월 개소 예정인 광주트라우마센터의 첫 센터장까지 떠맡아 준비작업에 힘을 쏟고 있다. ‘제록스’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총명했던 의대생을 평탄치 않은 길로 이끈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 요즘 힐링이 대세다. 힐링뮤직, 힐링캠프, 힐링카페, 힐링투어…. 이윤 창출에 동물적 감각을 지닌 자본주의의 첨병들은 ‘힐링 마케팅’이라는 섬세하고 유혹적인 키워드로 고객님들의 메마른 소비 감성을 적신다. 우리 사회의 상처가 그만큼 깊고 넓으며, 치유의 욕구가 크다는 방증일 터이다. 아사드와 강용주는 똑같은 의사로 출발해, 한쪽은 죽임의 길, 다른 한쪽은 치유의 길을 걷고 있다. 맨 처음부터 하늘이 정한 운명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삶의 방향을 가를 선택의 갈림길은 한번쯤 누구에게나 온다. 조일준 국제부 기자 iljun@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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