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 경제부장
남자 취객이 경찰서 조사실 소파에 큰대자로 뻗어 있다. 그 옆에선 여자 취객이 조사관 앞에서 횡설수설이고. 조사 도중 어느 대목에 귀가 번쩍 뜨였는지, 남자 취객은 갑자기 자리를 떨치고 일어서선 조사관에게 삿대질을 하며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지금은 없어진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 ‘우리를 술 푸게 하는 세상’은 아이들보다 아무래도 어른들한테 더 인기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에도 ‘개콘’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박성광이 눈을 부라리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국가를 탓하던 모습은 지금 떠올려도 통쾌해 빙긋 웃음을 짓게 한다.
무상보육 논란에서 혜택 범위를 둘러싼 국가와 개인의 역할 따위 본 문제를 제쳐두더라도, 논란의 빌미를 제공한 정부 당국자의 발언이 내겐 좀 ‘개콘스럽게’ 들렸다. “재벌 손자한테까지 무상보육 서비스를 해줘야 하느냐”는 짐짓 비장한 투의 발언이 그랬다. 어째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소리다.
액면은 같아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달리 들리는 게 사람의 말이다. 가령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말이 고승의 입을 통하면 가슴에 새겨야 할 법어가 되지만, 내 입에서 나왔다면 과음을 증명하는 흰소리라는 핀잔을 듣기 십상일 터이다. 경제부처 당국자의 발언이 나라살림을 고려해 재벌 손자는 혜택의 범위에서 빼겠다는 가상한 의지로 읽히지 않고, 증세 논리를 차단하려는 선제공격이 아닐까고 의심하게 되는 게 배배 꼬인 내 못된 심사 탓만일까. 이 정부가 재벌을 제대로 규율하려는 노력을 그동안 기울여왔다면 그 ‘텍스트’는 텍스트대로 받아들였겠지만, 그렇지 않은 바에야 그간의 행적을 뒤밟아 파악한 ‘콘텍스트’에 비춰 읽을밖에.
무상보육 논란 직후인 지난 6일 인터뷰를 위해 과천청사 집무실에서 만난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7월 중에 무상보육에 대한 지속가능한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으니 기다려볼 일이겠으되, 내년 이후엔 0~2살에 대한 무상보육의 혜택 범위를 줄이는 쪽으로 방향이 잡히고 있다.
나라살림(재정)의 책임을 지고 있는 예산당국, 재정부로선 마땅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겠지만, 정부안을 만들어내는 셈법에서 눈에 보이는 ‘정량’ 지표 말고,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정성’ 지표도 고려했으면 좋겠다. 범위가 조정되더라도 일정 수준(예컨대 소득 하위 70%) 아래는 이러나저러나 무상으로 혜택을 받게 되니 문제가 없지 않으냐고만 주장할 일이 아니다. 모두 다 받는 걸 권리처럼 받게 되는 것과 ‘선별당해’ 받는 경우의 부모 심정이 같을 리 없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바다.
선별적이니 보편적이니 하는 거창한 철학적 논쟁 말고 경제적 효율성 측면에서도 추가로 고려해볼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득 몇 퍼센트 아래 계층을 가려내는 과정에서 들어가는 행정비용이 만만치 않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서비스를 해주고, 모자라는 재원은 세금을 더 거둬 충당하는 게 사회 전체로 보아선 경제적으로 더 남는 장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미리부터 차단할 일은 아닐 것이다.
한참 늦은 나이인 40대 중반에 아들을 얻어 돌잔치를 며칠 앞둔 친구가 있다. 0~2살 무상보육 혜택을 제대로 받고 있는 행운의 계층인 셈이다.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으로 청소년 나이대에 이른 내 처지에서 보육은 이제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긴 했어도, 우리 사회가 이만큼 왔구나 싶어 한편으로는 뿌듯해지기도 한다. 그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개콘의 재미까지 알게 될 때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어, 제법 있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기에는 아직 이른 건가.
김영배 경제부장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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