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프로그램보다는 1박2일이나 무한도전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고 싶어요.” 지난 7일 북한산 아래 카페에서 만난 이지성 작가는 대중 곁으로 다가가고 싶은 열망이 강하다며, 작가도 대중이 원한다면 유쾌하게 망가질 수 있다고 밝혔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김두식의 고백] ‘자기계발서 작가’ 이지성씨
빈민가에서 무명작가로 15년, 난 밑바닥을 알기 때문에
독자들이 내 책을 많이 읽고 희망 얻으면 보람이 있죠
빈민가에서 무명작가로 15년, 난 밑바닥을 알기 때문에
독자들이 내 책을 많이 읽고 희망 얻으면 보람이 있죠
팬들에게 실망한 적도 있어요
강의한다면 2천명이 오고 봉사하자면 5명 와요
내 이름 팔아먹은 멘티도 있고 <꿈꾸는 다락방>(2007), <여자라면 힐러리처럼>(2007), <리딩으로 리드하라>(2010), <독서 천재가 된 홍대리>(2011) 등의 베스트셀러를 쓴 이지성 작가에 대한 제 주변의 평가는 대체로 둘로 갈렸습니다. “인문고전 붐을 일으킨 고마운 작가”라며 그의 선행과 기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팔아먹기 위해 가벼운 책만 쓰는 작가”라며 “이번 기회에 철저히 검증해 달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200만권 이상의 책을 팔아온 초대형 작가인데 아예 그를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의외였습니다. ‘자기계발’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탐구한다는 마음으로 북한산 입구의 카페에서 이지성을 만났습니다. -책을 엄청나게 많이 쓰셨더라고요. “먹고살아야 하니까요.(웃음)”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책을 묻자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에 대한 긴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잘못됐는지를 고민하다 보니 고전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리딩으로 리드하라>를 쓰고 나서 재벌이나 수백억대 부자들을 많이 만났는데 세금을 제대로 내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탈세를 하면 징역형에 처하고 재산을 모두 몰수해서 투명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다소 과격한 주장도 펼쳤습니다.
돈벌이와 사업, 작가의 길 사이에서
-<스물일곱 이건희처럼>(2010)을 쓸 때와는 생각이 바뀐 건가요?
“그때만 해도 세계 1위를 한 재벌의 좋은 점을 배우자는 생각이 강했어요. 재벌을 만난 적도 없고 몰랐으니까. 그런데 막상 제가 성공하고 재벌이라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니까 ‘큰일 났구나. 순진하게 낭만적으로 생각할 게 아니구나. 무서운 일이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최근 1~2년 사이에 뼈저리게 깨달아서 앞으로는 재벌과 친일파에 대한 비판을 담은 책도 쓰려고요.”
-너무 늦은 깨달음 아닌가요?
“자기계발서 쓰는 무명작가로 15년을 보내고 빈민가에 살다 보니, 주변에서 ‘일단 빚이나 갚아라. 빈민가에서나 나오라’는 비아냥거림을 계속 들었어요. 스카이(SKY) 대학을 나와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이 말하면 인정해주겠지만, 저는 주변에서 모두 병신 취급하던 상황이라 그런 얘기를 꺼낼 수도 없었어요.”
-<스물일곱 이건희처럼>을 읽다 보면 프레임을 미리 잡고 이건희를 끼워 맞춘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그렇죠. 이건희에 대한 책이 아니죠. 이건희를 아이콘으로 제 주장을 펼친 거고, 힐러리도 그렇죠. 저한테는 팔아먹을 대상이 필요했으니까요. ‘스물일곱 이지성처럼’ 이렇게 쓸 수는 없잖아요.(웃음)”
-과거에 자기계발서를 쓰는 작가였다면 지금의 본인은 어떻게 정의하세요?
“지금도 자기계발서 작가예요. 재벌 비판도 자기계발이에요. 자기계발은 결국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인데, 그동안 주로 수신을 말했다면, 이제는 치국평천하의 이야기도 쓰려고 해요. 저는 대중작가이기 때문에 지식을 자랑할 마음도 없고, 상 받는 것도 관심 없어요. 독자들이 제 책을 많이 사 주고 ‘작가님 덕분에 희망을 얻었습니다’라고 할 때 살아 있는 걸 느낄 뿐이죠. 신문 서평도 반갑지 않아요.(웃음) 거기 실리면 오히려 대중들이 거리감을 느끼거든요. 저는 일종의 지식 엔터테이너죠. 그동안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니 이제는 당신이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당신이 왜 부자가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보여주고 싶어요. 반전이 있는 드라마인 셈이죠.”
-대중작가로서 이제는 재벌개혁 얘기도 상품성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책은 원래 상품성이 없어요. 자기계발서는 제일 상품성이 없고요. 사람들이 변화의 계기가 필요한데 환경이 워낙 척박하니 이런 책이라도 읽을 뿐이에요. 돈을 생각하면 사업을 해야죠. 회사 세우고 3박 4일에 300만~400만원씩 받는 자기계발 프로그램을 운영해서 1년에 80억을 벌었다고 소문난 분도 있어요. 대기업에 새끼강사를 파견해서 커미션을 받는 산업이 짱짱해요. 시이오(CEO)를 위한 고전강좌를 하고 1인당 1000만원씩 받는 분도 있어요. 제가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면 재벌이 됐겠죠. 그러나 그건 돈벌이고 사업이지, 작가의 길이 아니에요. 저에게도 얼마나 많은 유혹이 있겠어요. 회사를 세우자, 이름만 걸고 대기업에 새끼강사를 보내자, 강의만 하면 수백명이 오니까 강당 빌려서 1일 80만원짜리 프로그램을 하자, 작가님은 와서 강의 한 시간만 하고 가라. 다 거절했어요.”
1992년 전주교대에 입학한 이지성은 글쓰기로 성공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93년부터 습작에 몰두합니다. 의사, 약사, 교사만을 최고의 직업으로 생각하고 아들이 부부 교사로 안정적인 삶을 누리기를 바라던 좀 “괴이한” 아버지는, 시집을 끼고 다니며 평균 2.2의 학점을 유지하는 이지성을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원고를 뺏기고 빗자루로 얻어맞은 뒤 집에서 쫓겨나기를 수십번, 갈 곳이 없으면 집 근처 대학 동아리실에 몰래 들어가 펼침막을 덮고 쪽잠을 잤습니다. 세 명의 여동생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모두 의사와 약사가 되었지만, 이지성은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교대를 졸업한 뒤에는 임용고시에 합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이익”과 한참 글 쓰는 재미를 느끼던 “이지성의 이익”이 맞아떨어져 군대를 연기하고자 전북대 법대에 편입해 졸업했고, 결국 군대를 마치던 2000년 1100명 응시자 중 903등의 성적으로 교원 임용고시에 합격합니다. 대학 때부터 기울었던 집안은 이미 보증으로 진 빚만 4억원에 이른 형편이라 더는 교사 생활을 피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성남의 빈민가에서 9년 넘게 살았고, 그중 7년을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습니다.
“한 집 건너 단전단수, 가스공급중지 안내문이 걸려 있는 동네였어요. 동료 교사 차를 타고 우리 동네를 지나는데 그분이 ‘여기가 제일 못사는 동네야. 내가 근무할 때는 새까맣게 때 묻은 애들이 와서 먹을 걸 달라고 하기도 했어. 더러워!’라고 하실 정도였어요. 신규 발령을 받아 오는 여교사가 있으면 선배들이 끌고 가서 얘기했죠. ‘총각 선생이 하나 있는데 빚더미에 올라 있으니 아예 말도 붙이지 말라’고요.”
교사시절의 또라이 취급, 소름 끼쳤다
-왕따를 당하셨군요?
“나중에 다른 학교로 옮기면서 ‘그런 얘기 때문에 선생님을 멀리했다. 미안하다’고 하는 분도 있었죠.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옥탑방에 서른 넘어 산다는 게 뭔지, 저는 밑바닥을 알아요. 교대 다닐 때 공부 안 한다고 받은 멸시, 교사 하면서 중산층 동료들에게 받은 멸시는 지금도 소름이 끼쳐요. 그때 그 눈빛들, 수군대는 소리들, 그 비참함. 노회한 아줌마 선생님들이 잘 대해주는 척하면서 뒤에서는 제 욕을 하고. ‘쟤는 영원히 끝났다’는 교직사회의 멸시는 안 받아본 사람은 몰라요. 왜 이지성은 자꾸 실용을 이야기하고 성공을 이야기하냐고들 하는데, 이런 과거를 모르면 저를 이해 못하죠. 옆집에 72살 할머니가 박스를 모아 파는데 하루에 2900원을 버셨어요. 그 할머니하고 40대 알코올중독자 아들이 같이 사는데, 그 사람들에게 사회변혁이니, 문학이니, 철학이니 말하면 먹힐까요? 그 세계를 빠져나오는 걸 가르쳐줘야 해요. 거기서 빠져나올 방법은 자기계발밖에 없어서 그런 사람을 위한 메시지를 쓰는 거예요.”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이지성은 하루 3~4시간만 자면서 계속 책을 썼습니다.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다가 80여 차례 거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학원, 과외 필요 없는 6·3·1 학습법>(2003)을 시작으로 10여권의 책을 냈지만 반응은 거의 없었고, 동료 교사들은 “아무도 안 읽는 책만 쓰는 또라이”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대표작이 되리라 자신했던 <꿈꾸는 다락방>마저 시장의 호응을 받지 못하자 절망한 이지성은 “마지막 남아 있던 욕심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성공이 찾아왔습니다. 2007년 가을 출간한 <여자라면 힐러리처럼>이 두 달 만에 20만부(총 40만부)가 팔리면서 <꿈꾸는 다락방>까지 덩달아 주목을 받아 곧 100만권 작가의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자신을 모욕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남아 있지 않나요?
“한때는 높은 위치에 올라가서 비웃어주고 두들겨 패주고 싶은 분노밖에 없었어요. 수류탄 던지고 자살하는 사병의 마음이 이해될 정도였어요. 잊지는 못하죠. 모욕 준 사람들이 대형출판사 편집장으로 그대로 남아 있고. 그러나 자기계발서는 그런 시기를 더 멋있고 아름답다고 가르치니까, 저는 그걸로 세뇌가 되어 긍정적으로 극복을 했어요. 도서관에서 10권씩 쌓아두고 마음이 치유될 때까지 읽었거든요.”
-작가님 책들을 한꺼번에 읽다 보니 자주 인용되는 예화도 많고, 상당 부분은 저도 예전에 (교회)부흥회에서 듣던 얘기들이더군요.
“제가 부족했던 거죠. 사람들이 많이 안 읽었으니까 알리고 싶어서 다시 써먹기도 했는데 앞으로는 웬만하면 안 그러려고요. 옛날 책 읽은 독자들이 왜 자꾸 사례가 반복되느냐고 하시면 창피한 마음도 들어요. 부흥회는 다녀본 적이 없고요. 저는 도서관에서 세로쓰기로 된 옛날 책들을 많이 읽었어요. 저한테는 보물이었죠. 저는 외국 작가가 쓴 그런 책들을 원전이라고 보고 그걸 주로 인용합니다.”
-<여자라면 힐러리처럼>은 힐러리의 성공 비결을 14가지로 정리한 책인데, 힐러리의 자서전 <살아 있는 역사>를 직접 읽는 게 독자들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자기계발서를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자기계발서는 그렇게 쓰는 거예요. 액션영화와 멜로영화의 관객이 따로 있는 것처럼 자기계발서와 인문사회과학서는 독자가 달라요. 그런 말씀은 대중의 선택에 대한 폭력이죠.”
-깊이 있는 책으로 가야 할 독자들을 자기계발서가 빼앗는 면은 없을까요?
“그것도 사회과학이나 진지한 책을 쓰는 분들이 할 일 없어 하는 고민이죠. 어떻게 대중에게 사랑받을지 저에게 배워 가셔야지, 그런 걸 분석하는 순간 저에게 독자를 더 뺏기는 거예요. 지금 스마트폰 나오고 갈수록 독서환경이 망해 가는데 정신 차리셔야죠. 요즘 독자들은 우리나라 인문학자들이 발끝에도 미치기 어려운 하버드나 예일 석학들의 강의를 유튜브로 봐요. 그분들이 경쟁해야 할 건 이지성이 아니라 마이클 샌델인 거죠. 저는 그분들한테 관심이 없어요. 제 시장이 따로 있고 제 독자가 따로 있는데, 왜 자꾸 여기 와서 딴지를 걸어요. 외국 작가들이 휩쓰는 자기계발서 시장을 되찾아온 유일한 한국 작가가 저예요. 애국자인 거죠. 저의 강점을 키워줘야죠.”
-기존의 자기계발서들을 참고해 책을 쓰는 것은 분명하지만, 인문고전을 강조하시는 것에 비해 인문고전을 인용한 일은 거의 없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인문고전을 얘기할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품위를 높이려고 맹자 이야기를 한 줄 넣어서 멋있게 하는 것은 조잡하다고 생각한 거죠. 독자들의 의견을 듣다 보면 ‘지식인은 지식 전달 위주로 지적 우월성만 있다. 작가님은 그쪽으로 넘어가지 마세요’라는 얘기를 들어요. 이렇게 쉽게 써주는 사람은 이지성밖에 없다고. 그래서 의식적으로 그런 얘기는 빼는 겁니다. 제 책의 독자 중에는 태어나서 처음 읽은 책이 제 책이라는 분들이 많아요.”
팬카페를 떠났던 이유, 돌아온 이유
-5만명이 넘는 팬 카페를 가지고 계신데, 팬들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 않나요?
“얼마 전에는 제가 팬카페 탈퇴하고 글을 모두 지운 적도 있어요. 제가 독서법 강의하겠다고 하면 2000명이 와요. 그런데 영등포 노숙자를 위해 밥 푸자고 하면 5명이 와요. 그걸 보고 기대를 많이 접었죠. 자기계발 추구하는 사람들이 그렇죠. 멘티라고 키워주면 나도 모르게 나를 이용해서 돈벌이하는 사람도 있어요. 저에게 잘해서 성공한 멘티를 보고는 자기들끼리 충성경쟁도 벌어졌고요. 그래서 제가 팬카페를 떠난 건데, ‘팬카페에서 상담하고 자살 안하게 된 사람이 매년 200명 이상인데 작가님이 떠나고 팬카페가 없어지면 어떻게 하냐?’는 얘기를 듣고 다시 돌아왔어요.”
-믿었던 사람들이 왜 그렇게 됐을까요?
“그렇게 돈을 벌어서 기부하려고 했대요. 그래서 ‘내가 독서를 19년 했는데 아직도 독서 앞에서는 미성년자다. 조심하느라 독서법 책도 안 썼다. 네가 생후 18개월인데 돈을 받으면서 뭘 가르친다는 말이냐?’고 했죠. 이번 일을 겪으면서 공황장애에 걸릴 뻔했어요. 차를 몰고 우체국에 갔는데 사람들이 다 나를 이용해 먹고 있는 것 같은 거야. 대인기피증 걸리고. 성장통 같은 거죠. 그래도 대부분의 팬들은 건전합니다. 팬들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빈민가 인문고전 독서교육이나 세계 최빈국 마을에 학교와 병원을 짓는 프로젝트 등은 시작도 못했겠지요.” (인터뷰가 끝나고 1주일 뒤 이지성 작가는 “물의를 일으킨 팬카페 회원들이 전부 반성을 했고, 멘티에 대한 오해도 풀었다”고 알려왔습니다. “문제가 된 멘티는 책임지는 자세로 올해 번 돈 전부를 기아대책에 기부했다”고도 했습니다. 멘토 노릇도 상당히 고달파 보였습니다.)
-학생과 교사 시절에는 왕따였고, 성공한 뒤에는 팬들만 있고 친구가 없는 게 문제 아닐까요?
“술 마시고 일상을 이야기하는 친구는 없지만 제가 배신당했을 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회사에 출근마저 안 한 채 곁에 있어준 팬카페 친구들이 있어요. 6명의 천사들이에요.”
-사실관계를 최종 확인하는 출판사의 작업이 소홀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만.
“고치면 저한테 혼나죠. 저는 교정 교열밖에 안 받아요. 제가 기획하는 책에는 절대 손대면 안 되죠. 똥통 자존심일수도 있는데 저는 그게 작가라고 배웠어요.”
-“편집자는 언제나 옳다”는 스티븐 킹 같은 작가도 있는데요?
“미국 편집자는 작가 이상이니까. 한국 편집자는 스티븐 킹이 말하는 외국 편집자에 비하면 능력이 부족해요. 우리나라도 문학이나 인문사회 분야는 편집자의 자질이 높지만 자기계발서 분야는 그렇지 못하죠. 오탈자나 제대로 잡아줬으면 좋겠어요.”
-열심히 사느라 연애는 언제 하세요?
“최근에 여친과 헤어졌어요. 미인대회 출신이었어요. 생각해보니 미인대회 출신만 세 번 사귀었네요. 앞으로는 연애보다는 제 일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연애가 무의미한 것 같아서요. 언젠가 때가 되면 천사 같은 분이 나타나서 제 인생을 구제해주지 않을까요? 그땐 연애보다는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이지성은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켜온 사람입니다. 공격적인 질문에도 겸손하고 솔직하게 답변하는 태도가 보기 좋았습니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저하고는 초점이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를 부러워하면서도 자꾸 삐딱한 질문만 던지는 저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난 인터뷰였습니다. 그를 괴롭혔던 ‘노회한 아줌마 선생님’들과 그를 검증하겠다고 나선 제 태도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제 책이 안 팔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녹취·진행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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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때 내 방에서 여동생들과. 뒤는 아버지의 책들이다. 전부 고전이다.
교사 시절. 아이들과 방송 출연. 작가 이지성이 완성되어 가던 시기.
캄보디아 학교 개교식. 세계 최빈국 마을에 학교와 병원을 짓는 프로젝트 시작.
교대 시절, 교회 소풍 가서. 환한 얼굴과는 달리 매우 불행한 무명 청년 작가였다.
필리핀 쓰레기장 마을 톤도에서. 이때의 충격은 나를 영원히 바꿔놓았다.
서울, 부산 빈민가 인문고전 독서교육 자원봉사자들과. 1박2일 교사 수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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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유격훈련장에서. 몽상적인 청년에서 현실적인 사람으로 바뀌어가던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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