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보수언론과 한나라당, 뉴라이트는 2007년 대선 국면에 경제 프레임을 만들어냈다. 노무현 정부가 경제를 망쳤고 이제는 경제를 살릴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담론이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경제의 죽음을 슬퍼하는” 상황 연극까지 펼쳤다. 여기에 적잖은 민주계열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양극화 문제를 비롯해 ‘진보적 비판’으로 가세했다. 노무현 정부는 양쪽한테서 십자포화를 맞았다. 그에 따른 부메랑이 결국 정동영 대선후보한테 돌아가고 말았다.
보수언론과 새누리당이 2012년에 만들어내고 있는 프레임은 단연 종북이다. 이명박 정부의 참담한 성적표를 고려할 때 다른 화두가 마땅찮은 터다. 경제로 안 되고 복지를 내세울 수도 없고 남북관계와 평화는 더욱 곤란하다. 종북은 야권을 교란하는 데도 그만이다. 박근혜 의원이 “국가관을 의심받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돼서는 안 된다”며 직접 불때기에 나서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들의 종북 여론몰이는 근거가 없는, 말 그대로 여론몰이일 따름이다. 통합진보당 옛 당권파 사람들은 고작해야 좌파 민족주의자들이다. 우리 사회의 핵심 문제를 계급간 불평등으로 볼 거냐, 미국의 패권주의가 초래한 민족모순으로 볼 거냐에서 후자를 택한 사람들이다. 이런 관점은 제3세계 사회운동을 뒷받침하는 보편적인 정세인식의 한 형태다. 옛 당권파 가운데 극히 일부가 과거 공안사건으로 수사받았지만 이들도 그 뒤 생각을 바꿨음을 여러 경로로 고백하고 있다. 옛 당권파 가운데 민주공화국을 폭력으로 전복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엄정하게 대처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정황은 어디에도 없다.
엊그제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우익 인터넷언론 ‘조갑제 닷컴’ 편집실이 쓴 <종북 백과사전>을 들추며 국무총리를 지낸 이해찬·한명숙 의원까지 종북이라고 지목했다. 종북 여론몰이가 저질 희극이며, 근거와 실체에는 애당초 관심을 두지 않은 ‘정치선동’임을 스스로 드러낸 셈이다.
문제는 일부 야당 정치인과 진보 지식인이 덩달아 춤을 춘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표적으로 잘못된 정치언어인 종북을 버젓이 자신의 언어로 사용한다. 이들은 종종 뭔가를 아는 체하거나 들춰내려는 몸짓을 한다. 이런 행위는 민주와 진보의 대열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 마련이다. 사정을 전혀 모르는 게 아니라 비슷한 무리에 속하는 사람이 주장하면 같은 이야기라도 신빙성을 더하게 되는 설득 원리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보수·진보 양쪽의 십자포화 속에서 침몰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파장이 예상된다.
종북 여론몰이에 관한 한 방관하는 것도 옳은 자세가 아니다. 차제에 어떤 세력을 솎아내자는 정파적 이해관계가 있을 수 있으나 지금은 그런 고려를 할 때가 아니다. 통합진보당 경선의 부정·부실 여부를 가리는 것과 종북 여론몰이에 대처하는 것은 분명히 달라야 한다. 민주주의자라면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려는 움직임에 단호하게 맞서야 마땅하다.
히틀러의 파시즘에 맞서 백장미단을 조직해 투쟁하다 교수형을 당한 독일 대학생 한스 숄, 조피 숄 남매의 이야기를 담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과 관련해 이런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독일 시민들은 히틀러한테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처음엔 유대인이 별다른 이유 없이 사회에서 제거되는 것을, 다음엔 공산당이, 다음엔 사회당이 제거되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정작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는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나치의 명령을 따르든지,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거리에서 사라지든지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었다….
박창식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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