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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유러피언 드림’의 몰락? / 김영배

등록 2012-06-17 19:10

김영배 경제부장
김영배 경제부장
미국의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이 <유러피언 드림>(The European Dream)을 펴낸 건 지난 2004년이었다. 이듬해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된 이 책은, 생전의 노무현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일독을 권했다는 입소문 덕에 특히 유명해졌음은 익히 알려져 있는 그대로다.

그리스를 필두로 위기에 빠져든 유럽 지역이 곤경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사태가 이어지자, ‘유럽의 꿈’은 빨리 깨어나야 할 헛된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의 비웃음 섞인 꾸짖음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그리스가 위기의 해법을 찾지 못하고, 스페인은 부도 위기(국채 수익률 한때 7% 돌파)에 빠져들고, 이탈리아와 프랑스도 덩달아 흔들흔들하고, 이 때문에 유로존의 맹주 독일마저 골머리를 앓고 있으니, 어쩌면 유럽 전체가 조롱받아 마땅한지도 모르겠다.

리프킨 교수(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가 책에서 ‘유러피언 드림’의 대척점에 배치한 ‘아메리칸드림’의 요지는 어릴 적 침대 머리맡에서 어머니가 그에게 들려줬다는 말 속에 녹아 있다. “제러미. 미국에서는 말이야 어떤 것이든 네가 택하면 할 수 있고 네가 원하는 어떤 사람도 될 수 있어. 그걸 정말 간절히 원한다면 말이야.”

상대어로 제시된 유러피언 드림은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 내의 관계를, 획일보다는 문화적 다양성을, 부의 축적보다는 삶의 질을, 무자비한 경쟁보다 온전함을 느낄 수 있는 심오한 놀이(deep play)를, 재산권보다 보편적 인권을, 일방적 무력행사보다는 다원적 협력을 강조한다고 리프킨은 정리한다. 이를 고스란히 뒤집어 놓은 게 아메리칸드림 쪽이다. 물론, 아메리칸드림에 부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유러피언 드림에도 밝은 면만 있는 게 아니어서, 개인적 책임의식과 전반적인 활력의 부족이란 문제를 안고 있다는 평을 듣곤 한다.

유럽의 위기를 접한 한국 사회에선 문제의 뿌리로 ‘복지병’, ‘국민들의 게으름’ 따위를 드는 비난성 해석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런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누리집에 실려 있는 2010년 기준 고용통계를 보면, 유럽 위기의 촉발자로 지목받는 그리스의 노동자 1인당 연간 노동시간은 평균 2109시간이다. 한국(2193시간)보다는 짧지만 유럽에서 가장 근면한 국민으로 유명한 독일(1419시간)보다 훨씬 길다. 노동의 질적인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위기의 원인을 단순히 게으름 탓으로 돌리는 것에 의심을 품어볼 실마리는 될 듯하다. 복지병 운운도 의심해볼 일이다.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나라들의 복지 체계가 훨씬 촘촘히 갖춰져 있다는 게 정설인데, 그쪽에선 위기의 파열음을 들을 수 없지 않은가.

애초부터 아메리칸드림 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던 한국 사회는 외환위기 뒤 그 경사도가 더 심해졌다는 게 통설이다. 그 결과는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심화였다. 이른바 시장만능주의의 폐해이며, 이는 아메리칸드림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좌절감이 넓게 퍼져 있고,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잘살 수 있다’는 말은 공허하게 들려 공명을 일으키지 못한다. 유러피언 드림에서 곧바로 그 해법을 찾지는 못할지라도, 이를 아메리칸드림에 대한 반성의 재료로 삼는 일마저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리프킨 교수는 <유러피언 드림>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아메리칸드림이,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 꿈이라고 말하곤 했다. 새로운 유러피언 드림은 삶을, 추구할 가치가 있게 해주는 꿈이다.’

김영배 경제부장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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