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논설위원
눈치는 약자의 생존술이다. 그 외피는 겸손함과 타인에 대한 배려지만 본질적 내용은 비굴함과 자기 이익 추구다. 눈치는 ‘약자가 강자의 마음을 살피는 기미이며 원리원칙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지혜’(이어령)다.
눈치에서 말은 불필요하다. 의사소통은 비언어적으로 이뤄진다. 힘있는 자의 안색의 변화, 목소리의 높낮이, 눈꼬리의 올라감과 내려감 하나하나가 판단의 중요한 요소다. 상황이 유동적이고 불확실할수록 눈치의 촉각은 더욱 맹렬히 발동한다.
본격적인 정치권력 변동의 계절을 맞아 곳곳에서 눈치보기 판이 벌어지고 있다. 눈치가 빠르면 절에 가서도 새우젓을 얻어먹지만 눈치가 발바닥이어서는 다 받아놓은 밥상도 걷어찰 수 있음을 많은 사람들은 굳게 신봉한다. 눈치보기 열풍의 중심에는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라는 미래권력이 자리하고 있다.
권력자의 요건 중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게 하는 재주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기자생활을 한 분의 회고담 하나. 정부 주요 부처 고위공무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실적 보고회의 말미에 ‘각하 말씀’ 차례가 됐다. 대통령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모두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웬걸, 박 대통령은 회의 도중 뭔가를 써놓은 메모지를 차곡차곡 접어 양복 안주머니에 넣더니 아무 말도 없이 나가버렸다. 공무원 사회가 패닉 상태에 빠졌음은 물론이다. 대통령이 말없이 그냥 나간 이유는 무엇인가, 뭔가 단단히 화가 난 게 아닐까, 메모지에 써놓은 내용은 무엇일까 등등. 공무원 사회 전체가 대통령의 심기와 의중을 살피느라 급급했다. 탁월한 군기잡기 솜씨였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새누리당에는 눈치 주는 사람과 눈치 보는 사람만 있다”는 말이 화제가 됐다. 실제로 새누리당 사람들 중 박 위원장의 눈을 감히 정면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흘깃흘깃 곁눈질로 안색을 살피고 목소리 데시벨을 측정해 의중을 짐작할 뿐이다. 침묵으로 조직을 긴장시키는 능력은 그의 디엔에이에 각인돼 있는지도 모른다. 새누리당 원내대표-정책위의장 선거 전날 박 위원장이 정책위의장 후보인 진영 의원 지역구의 노인복지관을 방문한 깊은 뜻을 새누리당 사람들은 잘 안다. 벽을 치면 대들보가 울리는 법이다. 그리고 결과는 역시 예상대로였다.
정치권 바깥으로 눈을 돌려보면 눈치의 달인은 역시 검찰이다. 이런 미묘한 시기에 검찰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안다. 검찰은 이명박 대통령 측근 비리 수사에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검찰총장의 친위대인 대검 중수부를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에 맞서 중수부 존속 필요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도 측근 비리 수사는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검찰이 이명박 정권의 부정부패 척결에 앞뒤 재지 않고 나서리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현 정권 부정부패 수사는 양날의 칼과 같다. 자칫 잘못 건드릴 경우 그 화가 여권 전체에 미친다. 불법 민간인 사찰 사건에서도 확인됐듯이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위원장은 어쨌든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처지다. 검찰로서는 수사 속도와 수위 조절에서 고도의 눈치작전을 발휘해야 할 상황이다.
정부 부처도 눈치보기 모드로 전환한 지 오래다. “공무원들이 새로운 권력을 자극하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온다. 공무원 사회는 이명박 정권을 거치면서 권력 변동기의 줄서기 중요성을 처절히 깨달았다. 철저한 논공행상, 무서울 정도로 끔찍한 네편 내편 가르기는 공무원 사회를 뿌리째 흔들어놓았다. 새 정권이 들어서기 전에 미리미리 정치권과의 네트워크를 다져놓아야 한다는 절박감에 시달리지 않는 공무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눈치는 불합리할수록 더욱 빛나는 속성을 갖는다. 눈치가 판치는 세계에서 상식과 합리성은 발붙일 곳이 없다. 이런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는 불행하다. 그런데도 차기 집권의 가능성이 높은 정치세력은 벌써부터 눈치문화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봐도 세상 돌아가는 눈치가 수상쩍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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