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 경제부 금융팀장
4·11 총선으로 인한
감시망 소홀을 틈타
‘창고 열쇠지기’들이
임명되게 됐는데…
감시망 소홀을 틈타
‘창고 열쇠지기’들이
임명되게 됐는데…
어느 마을 대갓집에 잘 익은 술로 꽉 들어찬 창고가 있었다. 두주불사인 주인은 술 창고를 볼 때마다 흐뭇했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많았다. 술을 한번 입에 댔다 하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자신의 고약한 술버릇 때문이었다.
거듭된 과음과 그에 따른 건강 악화로 시달려온 주인은 급기야 좀 충직해 보이는 하인에게 술 창고의 열쇠를 맡겼다. ‘내가 어지간히 취한 듯하면, 술을 더 내오라는 명을 내리더라도 절대 들어줘선 안 된다’는 당부와 함께. 단기적인 쾌락을 포기하는 대신 장기적인 건강을 챙기려는 나름의 고육책이었다.
영국의 애널리스트 조지 쿠퍼는 금융위기의 기원을 다룬 책에서 중앙은행을 ‘술 창고 열쇠를 맡아 관리하는 하인’에 비유했다. 한국의 현실에 견준다면, 하인은 물론 한국은행이고, 주인 노릇은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행정부에 맡겨져 있다. 창고에 들어 있는 물건은 술 대신 돈이지만, 지나치게 많아질 경우 술 못지않게 해로움을 우리는 현실에서 눈으로 직접 봤다. 멀리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사태, 가까이는 한국의 부동산 거품, 가계부채 누적, 물가 급등이 모두 돈을 ‘과음’한 데 따른 ‘숙취’의 사례들이다.
돈 창고 열쇠지기인 한국은행에서 중심은 총재를 비롯한 7명의 금융통화위원인데, 이들 중 무려 5명이 4월에 한꺼번에 싹 바뀌는 매우 이례적인 상황을 맞는다.
술 창고의 열쇠를 대신 맡아 쥐고 있는 하인쯤으로 비유되긴 했어도 금통위원들의 ‘원론적’ 임무는 막중하다. 이들의 협의체인 금통위의 기준금리 결정은 경제 전반에 커다란 파동을 일으킨다. 기준금리의 오르내림은 예금과 대출 금리는 물론 주식과 채권, 부동산 값, 실물 투자의 요동으로까지 이어진다. ‘현실적’ 대우는 원론적 임무 이상으로 눈이 번쩍, 귀가 쫑긋해지게 만든다. 한 해 3억~4억원의 연봉에, 기사 딸린 3000㏄급 승용차를 받는데다 임기는 무려 4년이다.
며칠 전에 한 지인이 정통한 소식이라며 금통위원 후보군에 들어 있다는 이들을 귀띔해줬다. ㅅ대 ㅁ교수, ㄱ대 ㅇ교수, ㅇ대 ㅈ교수, 금융 관련 기관장을 맡고 있는 ㄱ씨, 또다른 ㄱ대의 ㅊ교수. 이들이 실제로 유력한 후보인지, 내 정보 깜냥으로는 검증할 수가 없다. 현실적 대우에 걸맞게 원론적 임무를 잘 수행할 만한 이들인지 판단할 요량도 내겐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4월 총선(11일)이라는 큰 정치 일정에 가려져 감시망이 소홀해진 틈에 ‘술 창고 열쇠지기’들이 임명될 수밖에 없게 됐다는 사실이다. 임기 만료를 1년도 채 남겨두지 못한 임명권자(대통령)로선 창고 열쇠를 맡아 관리할 만한 역량과 뚝심의 인물보다, 사적 인연으로 이리저리 얽힌 인사들에게 ‘성은’을 베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셈이다.
총선만큼 재미는 없어도 후임 금통위원 인선의 ‘내용’은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만큼 중요한 사안으로 여겨진다. 한발 더 나아가 인선의 ‘방법’을 둘러싼 논의로 이어지면 더 좋을 테고.
현재 선임 방식에서 금통위원들은 사전적으로나 사후적으로 돈 창고 주인의 주인 격인 국민(현실적으로는 국회)에 책임질 일이 전혀 없다. 한은 내부의 ‘중앙은행 독립성’ 구호가 그리 절실하게 와닿지 않는 게 적어도 내겐 이런 배경 때문이다. 금통위원 선임 때 추천권 일부를 국회로 돌리고 국회의 청문회를 거치도록 하며, 선임 뒤에도 국회의 감시를 받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를 귀담아들어볼 만한 때다. 이는 물론, 술 창고 주인의 주인을 위한 것이지만, 하인들의 장기적인 입지를 위해서라도 필요해 보인다.
김영배 경제부 금융팀장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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