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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웅녀가 되어라!?

등록 2005-07-24 19:54수정 2005-07-24 20:05

이인우 사회부 기자
이인우 사회부 기자
아침햇발
통합교과형 논술이 대입 본고사의 부활이냐 아니냐를 놓고 벌어진 정부와 서울대의 힘겨루기를 관심있게 지켜보면서도, 내 문제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대통령의 학력 콤플렉스 시비까지 낳은 논란의 후폭풍이 한 가정에 불어닥쳤다. 직격탄은 초등학교 6학년인 그 집 딸아이가 맞았다.

‘초딩’의 마지막 여름방학을 어떻게 보낼지 궁리하던 아이는 엄마 손에 이끌려 난데없이 고교 입시학원 입원 시험을 치렀다. 본고사 부활논쟁을 예의 주시하던 엄마가 분연히 일어서고, 소심한 아빠가 엉거주춤 사태를 방조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이로써 22일 여름방학을 한 딸은 25일 영어 수학 논술 따위를 집중적으로 ‘심화’ 학습하는 입시학원 버스를 매일 아침 타게 됐다. 실컷 늦잠을 자리라던 아이의 여름방학도 사흘 만에 짧게 끝이 났다.

사연인즉 이렇다. 서울대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통합교과형 논술이 사실상의 본고사라는 입시 전문가들의 평가와 또래의 자녀를 둔 동네 아줌마들의 발빠른 행보에 엄마는 갑자기 불안해진 것이다. 그렇군! 그게 그런 거로구나!(세상에서 가장 빠른 발을 가진 게 있다면 그건 아마 서민들의 불안감일 게다.)

초등 학부모에 불과했던 엄마는 특목고나 자립형 사립고 같은 학교가 본고사 중심의 대학 입시에 명백히 유리하다는 사실을 학습했고, 학교가 책임져 주지 못하는 한 과외비 증가는 불보듯한데, 남편이란 자의 수입은 한심한 수준이라는 자가진단도 마쳤다. 엄마는 그길로 대형 특목고 입시 전문학원으로 달려갔다. 접수창구에 가보니 자기 같은 초딩 학부모들이 부지기수였다며 안도의 가슴도 쓸어내렸다.

아내의 잔머리가 목표하는 바는 이렇다. 어차피 고액의 과외를 시킬 형편은 못 되니, 지금부터 학원에서 실력을 길러 기숙 특목고에 입학시킨 뒤 아예 생활까지 맡겨버리자.

딸아이는 왜 벌써 입시학원에 가야 하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면서도 엄마가 미끼로 내건 휴대폰에 더 마음을 뺏기는 게 차라리 아이다워 반가웠지만, 학원을 둘러본 아빠의 마음은 영 편치 않았다. 더욱이 웬 고교입시 학원에 초등학교 4학년반이 다 있냐고 놀라워했더니, 기자가 세상 물정 너무 모른다는 아내의 핀잔이 돌아왔다. 교육 담당 기자에게 이런 얘기를 하자, 학원가의 특목고 입시 설명회장은 초등 학부모들이 절반이란다.

도대체 누가 입시 사교육을 부추기는지 불문가지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재료가 좋지 않으면 만드는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좋은 물건을 만들기 어렵다”고 서울대학교 총장님은 말씀하신다. 서울대가 우리나라 제일의 대학이란 건 잘 알지만, 그게 오로지 극소수의 우수 학생들이 입학해서라면 서울대 교수님들이 그동안 한 일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딸아! 25일부터 너는 사실상 입시경쟁의 대열에 들어섰다. 여름방학이면 배낭에 시집 한권 넣고 이 산, 저 들판으로 싸돌아다닌 아빠로서는 미안하기 그지없구나. 집과 학교와 학원의 꼭지점 안에 꽃다운 10대를 가두게 될 너에게 지금부터의 고생은 먼 훗날 세상구경 제대로 하기 위한 준비라고 말한다면 기만이 될까?


자식 공부 앞에 부모가 무슨 거짓말을 못하랴만, 아빠는 다만, 이런 마음이다. 우리 할머니 웅녀께서는 마늘과 쑥만으로 동굴 속에서 의연히 버티어냈나니, 6년 뒤의 시험지 모양이 네모가 되든 세모가 되든, 부디 굳세게 버티어다오.

이인우 사회부 기자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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