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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지금’을 외면하는 ‘과거 단절’ 약속

등록 2012-03-07 19:26수정 2012-04-06 14:12

김종구 논설위원
김종구 논설위원
민주통합당의 지지율 고공행진은 ‘석달 천하’도 못 채우고 막을 내렸다. 인기란 한순간에 꺼지는 비눗방울이요, 실체가 없는 신기루다. 게다가 민주당의 인기는 자체 발광이 아니라 달빛 인기였다. 그러니 서러워하지도 억울해하지도 말라. 민심의 외줄타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고 덤벙대다 땅바닥에 곤두박질친 스스로의 부주의를 탓할 일이다.

민주당의 추락과 새누리당의 기사회생은 구조적으로 예정돼 있었다. 정치판은 언제부터인가 제대로 된 쟁점이 사라지고 ‘물의 전쟁’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물갈이의 폭과 새 물의 질을 둘러싼 수량·수질 논쟁이 정치의 주도적 담론이 됐다. 26.1%, 46.5% 등 건조한 퍼센트 수치로 나열된 통계정치학이 정치현상을 설명하는 지배적 학설로 자리잡았다. 당이 처한 여건상 이 대목에서 새누리당은 상대적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민주당의 방심과 착각, 오만과 온정주의의 자책골이 더해지니 결과는 뻔하다.

어쨌든 4·11 총선은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하는 형국이 됐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한국 정치의 묘미는 이런 데 있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결과가 뻔한 드라마보다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드라마가 구경꾼의 처지에서는 더 재미있는 법이다.

이번 선거의 흥미로운 특징 하나는 ‘심판론 대 심판론’이 맞붙은 점이다. 과거 총선의 예를 보면 야당은 ‘심판론’의 인파이팅으로 덤비고 여당은 ‘일꾼론’의 아웃복싱으로 도망 다니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거꾸로 ‘야당 심판론’을 들고나왔다.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참신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뻔뻔하다고 해야 좋을지, 참으로 난감하다.

박 위원장의 야당 심판론의 밑바탕에는 이명박 정부 심판은 자기한테 맡기라는 메시지가 깔려 있다. 이는 공천 과정에서 친이계의 대거 축출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학살’은 ‘쇄신’의 동의어가 됐고, ‘박근혜당 만들기’는 ‘환골탈태’로 칭송받는다. 친이계가 줄줄이 나가떨어지는 모습에서 국민은 카타르시스도 느낀다. 친이계 내쫓기가 과거 단절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은 뇌리에서 잊혀간다.

야당이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위원장의 ‘남매론’을 제기하며 안간힘을 써보지만 별다른 효험을 발휘하지 못한다. 사실 오누이끼리 사이가 벌어져 으르렁거리면 타인들끼리 싸우는 것보다 훨씬 험악하게 보인다. 똑같은 80%는 안 보이고 20%의 차이만 크게 부각되기도 한다. 일종의 착시현상이다. 그럼에도 체내에 간직된 디엔에이의 본질은 비슷할 수밖에 없는 게 이들의 숙명이다.

지금 새누리당이 강조하는 과거 단절은 친이계 공천 배제 말고는 모두 미래형으로 남겨진 상태다. 하지만 과거는 결코 색바랜 책갈피에 남겨진 아련한 추억이 아니다. 잘못된 과거는 지금 이 순간에도 현실을 규정하며 내일을 왜곡한다. 바로 ‘오늘의 과거’요 ‘미래의 과거’다.

대표적인 것이 검찰과 언론이다. 이성을 잃은 검찰의 정치개입과 방송사의 여권 편향 보도는 이 정권이 만든 ‘잘못된 과거’의 전형이다. 그런데 개혁과 쇄신의 대상이 돼야 할 검찰은 오히려 더욱 노골적인 정치개입으로 자신들의 ‘미래 개척’에 나섰다. 사상 유례없는 방송사 동시파업 사태 속에는 총선·대선 과정에서 여권 편들기 보도를 판가름짓는 중대한 정치적 의미가 함축돼 있다.

그런데도 박 위원장은 침묵한다. 현 정권 측근비리에 대한 성역 없는 처리를 말하면서도 검찰과 언론은 성역에 고이 모셔둔다. 가만히 놓아두면 확실한 우군이 될 집단을 괜히 건드려 화를 자초할 필요가 없다는 계산 때문인가. 아니면 검찰은 영원히 권력의 칼로, 방송은 여권의 홍보 도구로 붙들어놓아야 한다는 신념 때문인가. 하기야 <한국방송> 도청 의혹 사건의 중심인물인 ‘친박계’ 한선교 의원을 단수공천자로 확정한 게 새누리당 공천혁명이다.

박 위원장은 누가 뭐래도 이제 여권의 사실상 일인자다. 과거 단절을 딱히 미래형으로 유보해 놓지 않아도 될 현실적 힘도 갖고 있다. ‘과거의 활개침’을 방관하면서 울려 퍼지는 ‘과거 단절’의 외침은 그래서 공허하기만 하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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