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사카린의 추억 / 김영배

등록 2012-02-28 19:47

김영배 경제부 금융팀장
김영배 경제부 금융팀장
밀수 사건의
쓴맛·단맛은
형제 사이에
갈렸지만…
변변한 구멍가게 하나 없던 1970년대 시골 동네 아이들에겐 사카린도 감미 탐닉의 대상이었다. 가끔씩 부엌 찬장 속 유리병에 담겨 있던 작고 납작한 육각기둥 모양의 그 흰색 결정체 몇알을 입에 털어넣고, 깨물어 먹거나 빨아 먹으며 단맛의 허기를 채웠다.

법정으로 번진 삼성그룹 대주주 가문의 형제간 재산다툼이 ‘사카린의 추억’을 새삼 떠올리게 했다. 이번에 먼저 싸움을 건 형이 동생에게 ‘삼성 왕국’의 권력을 빼앗긴 실마리가 이른바 ‘사카린 밀수 사건’이었음은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는 그대로다.

밀수라는 아름답지 못한 사건에 얽힌 이맹희씨가 동생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 밀려 삼성 경영권에서 배제된 뒤의 사태 전개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동생 쪽이 삼성 회장에 오른 1987년부터, 형 쪽 집안이 씨제이(CJ·당시는 제일제당)로 분가해 나온 1995년까지 그야말로 치열한 암투가 이어졌다. 여진은 그 뒤로도 오래도록 남아 간헐적으로 폭발했고, 이번에 동생을 상대로 한 형의 ‘소송’ 제기와, 형 쪽을 목표로 삼은 동생 쪽의 ‘미행’ 논란으로까지 번져 일촉즉발 상태다. 형에 이어 누나까지 법정 다툼에 가세해 긴장감을 한껏 높여놓았다.

삼성가의 다툼을 둘러싼 세간의 관심은 누가 승리할지에 쏠려 있는 듯하나, 쟁송의 주요 대상물(삼성생명 주식)이 좀 유별난 이력을 지닌 물건이어서, 정작 중요한 대목은 따로 있다는 지적에 귀를 기울여볼 상황이다.

삼성생명 지분 구도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1998년과 그로부터 꼭 10년 뒤인 2008년 두 차례에 걸쳐 대격변을 겪었다. 그 과정을 통해 1대 주주 이건희 회장의 지분은 10.0%에서 현재 20.8%로 늘어나 있다. 1999~2000년에 이 회장이 삼성자동차 부채 처리용으로 삼성생명 주식 400만주(20.0%)를 내놓았음에도 지분이 도리어 2배로 늘어난 기묘한 사연의 배경에는 ‘차명’주식이 깔려 있었다. 삼성 전·현직 임원들 이름으로 숨겨져 있던 주식을 실명으로 전환함으로써 지분을 늘려왔던 것이다.

삼성생명 주식을 차명으로 은닉해 놓았던 목적은 상속·증여세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됐고, 실제로 실명 전환 과정에서 그 목적은 깨끗하게 달성됐다. 법규에 따라 원칙대로 처리됐다면, 그중 상당 부분은 세금으로 거둬들여져 우리 사회에 골고루 뿌려졌어야 할 공동의 재산이었다. 형제자매가 ‘장물’을 놓고 서로 차지하려 다툰다는 거친 조롱이 나오는 배경이다.

삼성생명 차명 주식의 거래에 얽힌 속사정을 온전히 밝히고, 합당한 세금을 물리는 일은 ‘삼성 특검’을 거치고도 성사되지 못했다. 세월의 망각을 고려할 때 과세는 결코 녹록지 않은 과제일 것이나, 쉽사리 잊혀져선 안 될 중대 사안임이 틀림없다. 국내 1위 그룹 경영권의 법적·도덕적 정당성과 긴밀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탈세에는 법적 단죄가 이뤄져야 할 것이고, 아울러 저간의 불투명한 거래에 얽힌 사실관계를 또박또박 ‘기록’해 반면교사로 오래오래 ‘기억’하는 게 이미 자라고 있는 기업과, 앞으로 태어날 기업들의 법적·도덕적 뿌리를 튼튼하게 내리도록 돕는 길이라고 믿는다.

강력한 감미료인 사카린에서는 기이하게도 쓴맛이 아울러 느껴졌던 걸로 기억된다. 그게 궁금해 이번에 어느 식품영양학자에게 물어봤더니, “탁월한 결합력을 지닌 사카린 성분이 혓바닥의 쓴맛 수용체에도 잘 달라붙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려줬다. 양극단의 맛이 나란히 공존한다는 게 재미있다. 사카린 밀수 사건의 쓴맛·단맛은 형제 사이에서 갈렸지만, 이번 소송 사태의 쓴맛·단맛은 집안 내부의 엇갈림으로만 끝날 문제가 아닌 듯하다.

김영배 경제부 금융팀장 kimyb@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