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찬 탐사보도팀장
지역·계급 장벽 넘자는
‘한나라’를 버리고
다 갈아엎는 ‘새누리’를
내세우는 보수정당
‘한나라’를 버리고
다 갈아엎는 ‘새누리’를
내세우는 보수정당
오늘, 한나라당이 사라진다. 13일 한나라당 전국위원회가 당명 교체를 최종 의결하면, 새누리당이 정식으로 탄생한다. 사라지는 당에 대한 애증이 북받친다. 딱 10년 전, 나는 한나라당을 출입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정치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2004년 봄, 그 이력은 파탄났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직후 <인터넷 한겨레>에 ‘한나라당의 최후’라는 9편의 칼럼을 썼다. 기자라 하여 논리가 일관되지는 않는다. 당시엔 사명감에 불탔으나 돌아보니 부끄럽다. 시퍼런 독만 가슴에 남은 젊은 기자는 한나라당이 공공의 적이라고, 분석 대신 주장만 앞세운 글을 썼다.
보수주의는 혁명에 대한 공포에 뿌리를 둔다.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는 보수주의의 창시자다. 그가 진저리쳤던 것은 프랑스혁명이 불러들인 대혼란이었다. ‘정서적으로’ 나는 버크에 공감한다. 전쟁을 반대하는 것과 똑같은 심정에서 혁명이 두렵다. 기성 체제를 절멸시키는 혁명은 한 세대의 생물학적·정치적 에너지를 소진시킨다. 폐허 위에 들어설 ‘새세상’이 아무리 훌륭한들, 그 땅 밑에 사람들이 죽어 묻히는 일이 나는 싫다.
혁명에 대한 두려움 그 자체는 ‘수구’에 불과하다. 서구 보수정당은 혁명에 대한 공포를 정치 전략으로 승화시켰다. 누구나 골고루 기회를 누리고(복지), 누구나 정치에 동등하게 참여하고(민주주의), 누구나 공동체를 위해 책임을 다하는(공화주의) 이념·정책을 다듬었다. 이를 통해 체제 전복의 에너지를 길들였다. 마르크스의 고향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광범위한 노동자계급이 형성된 영국에서 왕족이 세대전승하는 이유가 오직 여기에 있다.
박정희의 공화당, 전두환의 민정당, 김영삼의 민자당은 혁명에 대한 공포를 ‘공포정치’로 표현했다. 반대 세력을 처벌하고 제 특권을 강화했다. 한나라당이 그런 과거와 절연할 수 있다면, 보수정당의 복지 프로젝트를 통해 서민의 삶에 큰 기여를 할 것이라 나는 기대했다. 2004년 탄핵 무렵 그 기대를 접었다. 그들은 민주·공화·복지의 반대편에 섰다. 접어둔 기대를 다시 펼쳐들 계기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한나라’의 간판을 내다버리는 것은 2004년보다 퇴행하는 일이다. 원래 그 저작권은 조순 전 부총리에게 있다. 1997년 11월 이회창의 신한국당과 조순의 민주당이 합당했다. 조순은 통합정당의 이름으로 ‘한나라’를 제시했다. 호남세력의 민주당 이탈을 지켜본 그에겐 지역주의에 대한 자괴가 적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시장주의의 폐해를 경계하는 케인스주의자였다. ‘한나라’의 세 글자에는 지역·계층의 차별을 넘어 ‘크게 하나 되는 나라’에 대한 비전이 있었다. 세상을 갈아엎겠다는 혁명을 순치시켜 나라 전체를 통합하는 게 보수주의이므로 ‘한나라’는 보수정당에 제법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세력 확대가 갈급하여 작명권을 넘겨줬던 이회창 총재는 대선 직후인 1998년부터 수시로 당명 개정을 시도했다. 2004년 당 전면에 등장한 박근혜 비대위원장도 당명 개정을 시도했다. 보수주의에 대한 고민은 예나 지금이나 많지 않았다. “대표 개인의 당으로 개편하려 한다”는 내부 반발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던 과거와 달리 당 대표를 견제하는 당내 민주주의가 최근 현저히 약해진 것이 유일한 차이다.
그 결과 무슨 맥락과 연유인지 그들 스스로 알지 못하는 당명을 새로 갖게 됐다. 새누리, 새세상 등은 1980년대 민중가요에 자주 등장했던 단어다. 갈아엎자는 혁명의 언어였다. 나는 그런 것까진 바라지 않는다. 서민·빈민에게 이 세상 살아갈 방도를 제시해주는 나라면 족하다. 새누리의 꿈은 진보정당에 맡기고 보수정당은 한나라 만들기에 충실한 그런 나라 말이다.
안수찬 탐사보도팀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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