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완벽주의자’ 홍정욱 의원
‘남의 밑에서’는 실패라 생각
코리아헤럴드 인수한 뒤
처음 기획 한달만에 다 쏟아
독고다이로 살아온 인생
‘완벽주의자’ 홍정욱 의원
‘남의 밑에서’는 실패라 생각
코리아헤럴드 인수한 뒤
처음 기획 한달만에 다 쏟아
독고다이로 살아온 인생
‘살아있는 이야기’에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지난 6년간 신문·방송의 인터뷰, 기고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도, 이번 인터뷰어 제안만은 덥석 물었습니다. 그런 이야기의 전달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공론의 장이 원형경기장으로 변질되면서 말을 칼처럼 휘두르는 강심장 검투사들만 살아남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관중들은 한 손에 돌을 들고 새로운 희생양의 피를 찾아 울부짖습니다. 상대방 진영의 이야기라면 그 뒤에 숨겨진 ‘꼼수’를 찾아내려고만 할 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랜 군사독재와 압축성장의 그늘에서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을 찾기 힘든 현실은 이런 사냥꾼 문화를 더욱 부채질합니다. 저는 ‘현안’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된 고백으로 이런 살벌한 분위기를 풀어보고 싶습니다. 무오류의 전적을 자랑하는 검투사 말고, 실수를 먼저 고백할 줄 아는 사람들과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너무 오글오글한 얘기인가요?
첫째로는 보수진영에 속한, 좀 ‘덜 한겨레스러운’ 사람을 만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한나라당 홍정욱 의원을 추천했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혹시라도 오해를 살까봐 포기하려던 차에 때마침 그의 불출마 선언도 나왔습니다. 우선 <7막 7장>부터 밑줄 그어 가며 다시 읽었습니다. 누가 볼까 숨겨놓고 읽은 그 책에서 도전정신으로 똘똘 뭉친 목표 과잉의 23살 청년 홍정욱을 만났습니다. 적잖이 불편했습니다. 그 청년이 얼마나 달라졌을지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으로 1월3일 시내 중심가의 호텔 살롱으로 향했습니다.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홍 의원은 인터뷰가 시작되자마자 최근 추진중인 <올재 클래식스>에 대해 자신감 넘치는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소외계층과 저소득 청소년을 위해 최고 수준의 고전 완역본을 3000원 안팎의 부담 없는 가격에 보급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멋진 얘기인데도 그의 묵직한 저음을 듣는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계산적인 귀족’이란 그의 이미지 때문이었을까요. 애초의 취지와는 달리 질문에 자꾸 날이 섰습니다. 홍 의원보다 제가 더 경직된 상태였습니다.
-인터뷰 시작하고 5분쯤 되었는데 사람이 아니라 ‘답변 로봇’하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말씀을 잘하시는군요.
“말 잘한다는 게 칭찬이 아닌데요. 질의서도 미리 안 보내 주셨잖아요. 국회의원 4년 동안 준비를 하나도 안 하고 나온 인터뷰는 이게 처음입니다. 발가벗고 나왔어요.”
-점심식사 후 이는 닦으셨나요?
“그럼요, 의원회관에도, 연구소에도 화장실이 있습니다. 자기관리에 철저한 편이라 늘 깨끗하게 닦고 씻고 다닙니다.”
-언제 어디서 키스할지 몰라 그런가요?
“언제 어디서 검증받을지 모르니까요, 오늘처럼.(웃음)”
첫인상은 역시 좀 재미없는 완벽주의자였습니다. 최근의 불출마 선언에 대해서는 “손톱만큼도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는 회의 때문에 부끄러워 국회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는 잘 준비된 답변이 나왔습니다. 정치 재개 가능성에 대해서는 “국회의원 그만두고 나중에 시장 하고 대통령 하는 길은 이명박 대통령이 한번 가셨기 때문에 이미 끝난 길”이라며 선을 그었습니다. 대변인 등 당직을 맡지 않은 이유는 “당직을 맡으면 자기 소신, 성향, 주관과 달리 모든 면에서 당과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는데, 자연인으로서 그걸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는 최근 상황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이명박 시장, 이명박 대통령이 정말 이런 일을 하고 계실까, 의문이 들 정도로 때론 치졸했다”고 말했습니다. 거침없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목소리’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 그가 한나라당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2004년에도 2008년에도 민주당 쪽에서 훨씬 적극적인 정계입문 요청이 있었습니다. 인재 영입에 신경을 쓰고 적극적인 민주당을 존경해요. 한나라당은 그런 것 없어요. 그 안에 계신 모든 분들이 너무나 훌륭한 분들이라 누구를 영입하고 새 인물 발굴하는 데 부담과 반감을 갖는 것 같아요. 제가 한나라당 선택했던 건 대북 문제와 기업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햇볕정책이나 노조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문제도 많이 느꼈죠. 제가 성장하고 교육받은 환경을 봤을 때 한나라당을 훨씬 더 잘 바꿀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세상을 바꾸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사명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 뿌리가 궁금해졌습니다. <7막 7장>을 중심으로 준비한 질문이 많았지만, “40대의 정제된 지성으로 20대의 거친 문체를 분석하느냐”는 그의 웃음 섞인 항변을 듣고 방향을 돌렸습니다.
-요즘 드라마의 대세는 본부장입니다. 부잣집 아들로 구김 없이 성장해 유연하지만 아수라장에 몸을 던질 것 같지는 않은 본부장, 그게 홍 의원의 이미지 아닌가요?
“저는 고2 때부터 박사 끝날 때까지 집에서 10원도 안 받고 장학금과 대출로만 공부했습니다. 대학 졸업할 때 학자금 대출이 1억이 넘었어요. 물론 유명배우의 아들로 유복하고 편하게 사랑받으며 컸습니다. 그러나 중산층이지 70년대 영화배우가 상류층은 아닙니다. 최민수씨나 전영록씨를 누가 귀족으로 생각합니까?(웃음) 아버지께서 ‘나는 가족을 세우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하지만 너는 사회에 획을 긋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단 한 번도 아버지 뒤좇아 연예계 생활을 한다든지 돈 잘 벌어 편하게 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나라당, 민주당에는 대대로 정치인 집안의 자손들, 기업가 집안의 자손들, 판검사, 교수 등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귀족이라 할 만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유독 제가 귀족 이미지의 전형으로 인지되는 것이 때로는 의아합니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웃음)”
-같은 하버드 출신인데도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지금은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고려대 박경신 교수 같은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박 교수는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닌 친구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그를 존경해요. 하지만 진보든 보수든 미국에서 운동하다 보면 대한민국과 오래 단절된 상태에서 피상적으로 훨씬 낭만적이 되는 경향이 있어요. 이곳에서 노동운동, 학생운동 하면서 폐해와 성과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달라서 좀 위험할 수 있죠. 박 교수가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고. 저는 대학 때 어느 그룹하고도 함께하지 않고 완전히 홀로 살았습니다.”
-살아오면서 가장 추웠던 때는 언제입니까?
“사업에 실패했을 때였죠. 로스쿨 졸업하고 리먼브러더스에서 억대 연봉을 받고 승승장구, 그 자신감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스탠퍼드 동문들과 함께 인터넷 기업을 창업했습니다. 완벽할 거라고 생각해서 올인했는데 사업이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1년 만에 도산했을 때 참 어려웠죠. 하버드대, 서울대, 베이징대, 스탠퍼드대에서 공부하고 뉴욕, 실리콘밸리, 홍콩에서 일하며 세계화의 전사로 컸는데, 결국 31살에 처자 거느리고 무일푼으로 한국에 들어와 아버지댁 문간방에서 살아야 했거든요. 한치 앞이 안 보였죠. 법무법인 같은 데 취직해보지 않겠냐는 주변의 권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사가 망한 게 실패가 아니라 남의 밑에 다시 기어들어가는 게 실패라 생각했기 때문에 절대 남의 밑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공익근무요원 생활까지 하며 다시 일어서야 했던 과정이 참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멍가게라도 오너 겸 시이오(CEO·최고경영자)가 돼야겠다고 생각하고, 무일푼으로서 인수할 기업을 찾았죠. 어느 기업을 살까 고민하다가 코리아헤럴드, 내외경제신문이 나온 걸 알았고, 제 평생 꿈 중 하나가 언론사 경영이었기 때문에 도전해 봐야겠다 결심한 겁니다. 도전은 했지만 막상 더 투자할 돈이 없는 상태로, 50년간 영업 안 된 회사의 영업을 살리고 돈 쓰던 회사를 돈 안 쓰게 하면서 흑자로 전환하려니 얼마나 풍파가 많았겠습니까? 회사를 살리기까지 3~4년이 저한테는 가장 힘들었고, 정말 많이 배우고, 인생의 비전을 다시 찾고, 가치관을 새롭게 한 시간이었습니다.”
-회사 살리면서 희생된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리먼브러더스와 월가에서는 기업의 가치를 살리는 일에 모든 포커스를 맞추면서, 그에 따른 폐해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정답을 주는 기술자, 즉 파이낸셜 엔지니어였지 경영자가 아니었죠. 처음 회사를 인수했을 때, 사람들 만나서 회사의 문제를 파악하지는 않고, (리먼의 방식대로) 숫자가 잔뜩 적힌 서류 뭉치만 가지고 저 혼자 독학을 했습니다. 어디서 얼마를 줄이고 얼마를 늘리고 어떤 변화를 하면 흑자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제 생각에는 정답을 가지고 회사로 들어갔죠. 제 심성으로는 사람들을 직접 보면 절대 개혁을 할 수 없을 거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미리 고연봉 저효율로 취급받는 직종의 구조조정 명단을 가지고 들어가서 구조조정을 단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거의 50~60명의 구조조정이 벌어졌죠. 물론 많은 위로금을 지급했지만, 제 평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 그 구조조정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회사를 살리기가 어려웠을까요?
“지금 되돌아보면 (0.5초쯤 멈칫했지만 단호하게) 가능했을 것 같아요. 구조조정 한 뒤 저의 처음 기획을 한달 만에 다 내버렸어요. 밖에서 숫자만 보고 피상적으로 가져온 공식하고 실제 회사 환경은 맞지 않았죠. 경영자로 들어와서 6개월, 1년 동안 어떻게든 버티면서 회사를 이해하고 그다음에 조직원들의 공감대와 토론을 통해서 정말 필요한 부위를 잘라냈으면 큰 부딪침은 없었을 겁니다. 구조조정이 필요 없었다는 게 아니고, ‘무식한 구조조정’은 필요 없었다는 거죠. 어쨌든 헤럴드미디어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저는, 이 세상에서 최악의 범죄는 회사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경영자로서 500명 임직원과 그 가족 생계를 말아먹고 관련된 채권자, 투자자, 모든 이해관계자들 망하게 하는 것은 살인·강도·강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범죄라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해고는 살인이다’와는 다른 차원이군요?
“그건 노동자 입장에서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말인데, 경영자의 최고 목표는 해고 금지보다는 부도 금지, 파산 금지입니다. 회사가 망하면 그 피해는 모두 노동자에게 가니까요.”
-<7막 7장> 증보판엔 ‘부모님과 주변 친지들’ 도움을 받아 헤럴드미디어를 인수했다고 적었습니다. 그 친지들엔 처가도 포함됩니까?
“포함되지만, 이유는 이렇습니다. 매출이 400억 정도 되는 큰 회사가 단돈 몇십억에 나왔거든요. 그 몇십억을 100% 거의 빌렸습니다. 처음에 실사하는 데 드는 몇천만원은 어떻게 마련했겠죠. 하지만 쥐뿔도 가진 것 없는 저를 뭘 믿고 돈을 빌려줍니까. 10~15명 온 가족이, 아버지, 어머니, 장인, 와이프, 누이, 아마 삼촌까지 가서 보증을 섰을 거예요. 보증을 서는 것과 돈을 줘서 편하게 인수하라고 하는 건 다른 얘기죠.”
-가족을 제외하고는 누구랑 노시나요. 주로 유학파들?
“제일 친한 건 중학교 때 친구들입니다. 서울대 정치학과 다닐 때의 친구들과도 가깝게 지내고요. 한국에 그 둘밖에 연이 없으니까요. 유학시절에는 주로 외국 애들하고 어울려서 유학파 친구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압구정동과 미국이라는 성장 배경을 한계로 느끼지는 않습니까?
“우스갯소리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아버지가 고등학교 때 한달에 한번씩 소포로 책과 시집, 사설을 보내주셨어요. 미국서 공부하니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요. 그런데 그때 <조선일보> 사설만 보내주셨어요.(웃음) <한겨레> 사설도 보내주셨으면 제가 더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 텐데.(웃음)”
-예상보다 훨씬 고독해 보입니다.
“국회의원 4년 내내 계보, 계파 없이 제가 할 소리 다 하고 살았습니다. 국회바로세우기모임을 하고 한-미 에프티에이 협상파로도 활동했지만, 민본21이나 어떤 모임에 정식 가입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끝까지 저항한 것 같아요. 믿는 것에 대해서 함께 활동하는 것은 괜찮은데, 어떤 조직에 들어가서 믿지 않는 것까지 함께하는 건 쉽지 않아요. 한국말로 ‘독고다이’를 뭐라고 하죠? 홀로 사색하는 성품인데다 기본적으로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요. 계급 배신자(class traitor)라는 말이 있죠. 세상을 바꾸는 것은 외부 혁명이 아니라 계급 배신자에 의한 내부 개혁이라고 생각해요.”
-책에 나오는 금발 미녀들이나 아내 말고 연애 얘기 하나 들려주시죠.
“지금까지 나온 얘기로도 충분히 안티가 많을 것 같은데, 5만명쯤 더하시려고요?(웃음)”
그는 아내 쪽으로 화제가 흐르는 걸 피했습니다. 사생활 보호는 결혼 당시 약속이라고 했습니다. 아내를 “공직자(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손녀”라고만 소개하고 “언론이나 세간의 주목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폐쇄적인 게 (아내가 속한) 상류사회 특징인 것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홍 의원은 몇 번이나 부모님과 친지들에 대한 고마움을 이야기하며 “저는 자수성가했다는 말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상류사회 출신인 아내와 자신을 구별하는 태도에서 ‘자수성가’로 인정받고 싶은 강한 의지를 읽었습니다.
-<7막 7장>을 보면 프로스트에서 엠마 골드만까지 인용이 너무 많아요. 트위터에서도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더군요.
“해 아래 새것이 없지 않습니까. 지적인 정직함이 중요해요. 미국 교육의 영향인지 문장 하나를 써도 어디서 봤다 싶으면 찾아서 출전을 써줘야 한다는 강박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제 얘기에서 가족 빼고, 귀족 취급 받을 것 빼고, 정치인 신분이니 기업 얘기 빼고, 다음에 정치할 것처럼 보이는 얘기 빼고 나면 남는 게 없어요. 공자님 말씀 말고는.(웃음) 저도 다 사정이 있습니다.(웃음)”
-목표만을 위해 달려온 재미없는 인생 아닌가요. 그렇게 규범적으로만 살다가 요즘말로 ‘멘붕’이 오면 어떻게 합니까?
“저 재미없습니다. 좋아하는 스키를 타도 1급 스키강사 시험을 목표로 연마를 해요. 제 아내나 주변 사람들이 보면 인생을 왜 그따위로 사냐고 하죠. 항상 주어진 틀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남들보다 조용히 했을 뿐이지 솔직히 놀 것 다 놀고 할 짓 안 할 짓 다 해봤다고 생각해요. 일탈에 대해 더이상의 궁금증이 없을 정도로 다 해봤어요.(웃음) 해탈까지는 아니지만 멘탈 붕괴될 정도도 아닙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머리에 남은 단어는 ‘혼자, 도전, 강박’이었습니다. 그는 ‘냉혹한 승부사’와 ‘고독한 자유인’이 묘하게 공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야당 성향의 기자와 보좌관들이 ‘매너남’으로 호평하는 데도 이유는 있었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안 믿을 사람은 안 믿으니까”라며 고정된 이미지를 억울해하는 것도 이해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미지를 만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7막 7장>을 쓴 23살의 청년 홍정욱 자신이었습니다. 남의 보증만으로 수십억을 빌릴 수는 없었을 테니, 재기하는 과정에서 이미지 덕도 톡톡히 본 셈입니다. 그리고 ‘자수성가’였든 아니든 40대 언론사주 홍정욱은 남은 평생 <7막 7장>의 부산물인 ‘계산적, 귀족적’ 이미지와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야 할 겁니다. 딱 그만큼만 세상이 공평한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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