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짧고 약하게, 그러다 점점 길고 강하게 전류의 세기를 높였다. 이때 발등의 살가죽이 꺼멓게 탔다. … 팔꿈치는 피딱지가 져 있었고, 발뒤꿈치에는 피고름이 흘렀다.”
고문으로 생긴 발뒤꿈치의 딱지를 보관해놓았지만 교도관들은 이를 없애버렸다. 검찰로 넘겨진 김근태는 고문피해 사실을 폭로했지만 수사검사는 발뒤꿈치의 고문 상처를 보고도 “증거가 없다”며 모른 체했다. 고문 흔적을 증거로 보전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판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족과 친지 접견마저 금지시켰다. 1·2·3심 판사 모두 고문의 증거가 없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당시 언론들 역시 고문피해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고문 뒤 ‘목사’로 변신했다는 이근안뿐 아니라 수사검사와 담당 판사, 취재기자, 그리고 그들의 상관과 배후의 ‘독재권력’이 모두 김근태에게 빚을 졌다. 그러나 마지못해 “진정성 없는” 사과를 한 이근안을 빼고는 아무도 그에게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이후 김근태는 정권교체와 정치혁명을 꿈꾸며 정치에 입문했다. 마침내 그가 바라던 정권교체는 이뤄냈지만 정치혁명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정치 거목 김대중과 부닥칠 수밖에 없었을 때 상당수 그의 동지들은 ‘명분’보다 ‘실리’를 택했다. 그의 정치혁명 꿈은 그래서 절반밖에 이룰 수 없었다.
그는 고문과의 투쟁에서는 이겼지만 끝내 그때 얻은 병마의 후유증은 이겨내지 못했다. 필자를 포함해 우리 사회의 모든 빚진 자들이 그래서 그의 영정 앞에 뒤늦게 사죄의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혁명을 꿈꿨던 개혁가 김근태가 오늘, 그가 존경하던 문익환 목사, 아끼던 친구 조영래 변호사, 그리고 영원한 노동자 전태일이 잠든 마석 모란공원에 묻힌다. 김근태 선배의 명복을 빈다. 김이택 논설위원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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